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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 알의 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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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알

- 정충영 교수(경북대 명예교수)


엘리아 패리시 러브조이(Elijah Parish Lovejoy)는 신문 편집장과 교사, 그리고 장로교 목사를 지낸 분입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흑인이 교수형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노예제도란 지독한 범죄와 맞서 싸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학교를 설립하고 언론계에 뛰어들었습니다. 남북 간의 갈등으로 곧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을 피해야하고 평화로운 노예해방이 이루어지는 데 신문이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로교 주간지인 〈세인트루이스 옵서버> (St. Louis Observer)의 편집인이 되어 노예제도를 강력하게 비판하는 한편 점진적인 노예해방을 지지했습니다. 그 당시 미주리 주는 노예제도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1835년 세인트루이스의 많은 저명인사들이 서명한 한통의 편지가 그에게 배달되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사설의 논조를 완화시키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견해와 그것을 발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답변을 되풀이해서 사설에 실었습니다. 군중폭동의 위협으로 신문사는 노예 자유주였던 일리노이 알턴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문사는 1년 사이에 여러 차례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러브조이는 “타협을 하는 것이 나의 임무를 포기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 자리에서 물러서지 않고 생명을 바칠 것이다.”

이 말을 한지 나흘 후인 1837년 11월 7일 밤 폭도들은 다시 신문사를 습격하여 러브조이를 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한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기소를 당하거나 고발되지 않았고 러브조이를 옹호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기소되었고 살인자 중의 한 사람은 앨턴 시의 시장으로 뽑히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모두들 러브조이의 죽음은 헛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러브조이의 순교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러브조이의 외침과 그의 삶에 커다란 감동을 받은 한 젊은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젊은이는 나중에 일리노이 주 의원에 당선되었고 드디어는 대통령이 되어 러브조이가 꿈꾸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러브조이라는 씨앗 때문에 열매를 맺게 된 그 젊은이의 이름은 아브라함 링컨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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