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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얼간이 게티의 부스러기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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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게티의 부스러기 땅 
 
- 정충영 박사(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로스앤젤레스 근처의 게티미술관은 미국의 석유 사업가이자 대부호였던 폴 게티(J. Paul Getty: 1892 ~1976)가 세웠습니다. 일생 동안 5회나 결혼했던 그는 40억 달러나 되는 기업자산이 있었고 수억 달러에 해당하는 미술품 수집으로 1953년에 개관한 것입니다. 1973년 이탈리아인에 의한 손자 유괴사건 때는 1600만 달러의 몸값을 범인들이 요구했으나 타협은 유사사건을 재발시킨다는 이유로 거절해 세상의 주목을 끌기도 했습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의 재산은 대부분은 유전산업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는 사업 초창기에 캘리포니아의 실 비취(Seal Beach) 유전 지대에 72평방피트의 조그마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유정탑(油井塔)들은 너무나 큰 면적을 차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게티의 조그마한 땅에는 유정탑을 설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게티는 그 땅을 버릴 수 없어 안달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조그마한 땅을 “얼간이 게티의 부스러기 땅”이라고 이름 지어 그와 그 좁은 땅을 비웃으며 그를 조롱하였습니다. 그 조그마한 땅은 유전지대의 중앙에 위치하였지만 너무 적어 가치 없는 땅 덩어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게티는 그 땅에 유맥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면서 어떻게 유정을 뚫을까 계속 궁리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유정 대원들에게 그 상황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하면서 만약 그들이 어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은 그들의 제안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고용한 유정대원들은 그 조그마한 땅인 “얼간이 부스러기 땅”에 적합한 소형 유전탑을 세우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로에서부터 그 조그마한 구역까지의 길 오른편에 네 발자국 넓이의 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유전시설 장비를 옮겨 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유정대원들은 게티의 격려에 힘입어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강구해 나갔습니다. 얼마 후에 누군가가 소형 유정탑을 72평방 피트 넓이의 소 구획의 땅으로 옮겨오기 위해서는 길 오른편의 네 발자국 넓이의 땅에 소형 철도선로를 건설하면 될 것이란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드디어 그 아이디어는 실천에 옮겨졌고 오래지 않아 그들은 몇 년 동안에 수천 배럴의 기름을 생산하는 유정을 뚫게 되었습니다.

게티의 위대한 점은 남이 업신여기는 그 부스러기 땅에서 무한의 가능성을 지닌 유전맥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견딜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참으로 많은 가능성이 두루 존재하고 있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어린이에게서도 무한의 잠재력을 볼 수 있다면 그는 그 어린이의 참된 교육자이며 훌륭한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3]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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