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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입양아 미셸과 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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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 미셸과 케빈


“다섯살에 나는 부모와 태어난 땅에서 버림받았고 프랑스 땅에 떨어졌다. 그 뒤 15년 동안 나는 내 뿌리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그것은 나의 풍요인 동시에 고통이다.”
해외 입양아 케빈의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풍요와 고통…. 하나는 프랑스가 준 것이고 하나는 한국이 준 것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단순화일까. 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것은 끊임없는, 그리고 교활한 고통이다. 무엇이든 한국을 떠오르게 하는 일이 있거나 엄마와 함께 있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이제 나는 그것에 길들여져 있다. 매일 그것과 만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만 한국 출신 입양아가 1만2천명을 헤아린다. 공식 통계가 없어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지만 유럽 전체에 10만명, 전 세계에 20만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 어림잡아 출생 인구의 1%를 해외에 내던지고 있는 상황인데 이들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거의 없다.

`선진 조국'을 외쳤던 1970년대에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해외 입양은 80년대 중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프랑스의 경우, 79년에 총 971명의 해외 입양아 중에서 639명이, 85년에 1988명 중에서 944명이 한국 출신으로 단연 으뜸이다.

다행히 지금은 줄어드는 추세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90년 이후 총 2천명에 달하며 그 중 장애아가 많은,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해외 입양의 실상은 한국 사회의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가난이 죄이고 장애아로 태어난 죄로 아이들은 지금도 버려지고 있다. 또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 구조가 어린 엄마들에게 아이를 버리게 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청년으로 성장한 입양아들이 자신이 버려지게 된 사회적 환경에 대해 한국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을 버린 부모와 한국에 간혹 한을 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관심을, 나아가 애정을 품고 있다.

200명에 가까운 회원을 가진 한국 출신 프랑스 입양아들의 단체인 `한국의 뿌리'에서 활동한 미셸(29)은 이렇게 말한다.

“2년 전에 한국 어머니를 찾았다.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어머니를 만나 무척 행복했다. 그녀는 언제나 내 어머니이다. 아버지가 그립다.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만이라고 만날 수 있었다면…. 나에게 부모는 네 분이다.”

미셸은 해외 입양보다 국내 입양을 택하겠냐는 물음에 `노'라고 답한다. 한국 사회가 아직 입양할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 사회가 장애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고 힐문한다. 그는 입양은 입양 집안을 위한 게 아니라 입양아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해외 입양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청년으로 성장한 입양아들이 한국과 입양국 사이의 사회문화적인 교류를 통해 그들에게 지워진 숙명인 이중의 정체성을 화합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들은 한국과 입양국을 잇는 가교 구실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동정이 아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우리가 당신들에게 보내는 관심만큼의 관심, 그 뿐이다.”

(홍세화/파리에서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지은이)

(추기 : 미셸과 케빈은 다른 입양아 친구들과 함께 2002년 월드컵에 맞춰 파리에서 서울까지 자동차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 대회 우승국으로부터 새 개최지로의 긴 여정은 어디로인지조차 모르는 채 비행기로 떠난 뿌리의 땅을, 땅을 밟으며 찾아가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국내로부터 지지와 경제적 후원을, 특히 한국산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의 바램에 응답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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