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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단풍은 스스로 물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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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스스로 물들지 않는다


이른 아침, 산에 올랐다. 어제 저녁 잠깐 뿌린 비로 단풍 색깔은 더 짙어졌고 밤사이 사람 한 키는 되게 아래로 내려왔다. 늘 올라가는 산 중턱. 그 모양새가 공룡의 하나님이나 했을 배설물 같은 바위에 비스듬히 누워 백운대를 바라본다.

이상하다. 앉아서 보면 느낄 수 없는데 모로 누워 바라보면 산의 숨결이 느껴진다. 산의 등줄기가 움직이는 것도 보인다. 저마다 키를 달리해 붕긋붕긋 솟은 산. 골짜기를 경계하고 또한 디딤 다리 삼아 서로의 맥도 이었다.

지난 9월 어느 날 아침 여기 왔을 때, 저 산의 나무들이 더 이상 물을 먹지 않는 걸 보았다. 그래, 이제 쉬는구나. 성장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렇다고 죽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어느 것도 ‘멈춤’이 죽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올해는 다른 해보다 단풍이 일주일쯤 이르고 다른 해보다 더 곱다고 한다. 저 고운 단풍은 저 혼자서 제 자태를 만들지 못한다. 땅이 입을 다물고 만물이 서서히 휴식을 취할 자세를 가지려는 때, 9월 중순 이후부터 갑자기 쌀쌀해지는 기온과 습기와 자외선 같은 자연조건에 영향을 받는다. 그런 영향이 복잡하게 얽혀서 생물학적 성분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아름다운 단풍을 그것 하나로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 저 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노란 은행잎, 새빨간 단풍잎들 속에 스며든 기후와 습기와 자외선을 함께 느끼는 것. 이런 태도가 생활에서 훈련된다면 아마 균형에 대한 가치가 저절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먹는 밥 한 그릇에서 농부의 정성, 생선 한 토막에서 어부의 성실, 갈아입은 옷에서 노동자의 근면함을 느낀다면, 하루를 교만하지 않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서 타인의 생명을 느끼는 마음이 우리 삶의 바탕에 깔리게 된다면 얼마나 이 사회가 부드러워질까.

물론 사회는 다양해야 하고 그럴수록 좋다. 하지만 다양성은 변치 않는 어떤 원칙 속에 존재한다. 아마도 그 원칙이라면 자기 안에 있는 타인, 타인 속에 있는 자기를 인식하고 그 관계를 살리는 ‘관계살이의 에너지’일 것이다.

내 입장과 타인의 입장을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버릇, 내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균형의 감각으로 저울질 해보는 습관, 이런 것을 키우는 사회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판단 기준이나 가치여서는 아니 된다.

오래도록 그 결과에 주목했던 노벨평화상이 김대중 대통령의 수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 상을 받으면 되느니 안 되느니 한 쪽에서 말이 많을 때, 혼자서 참 부끄러웠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지! 우리가 얼마나 사람 대접에 옹졸한지. 혼자서도 낯이 뜨거웠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함께 기뻐할 줄 아는 것. 그게 부럽다면, 내겐 없으되 사촌에겐 있는 다른 점을 배우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른 사회생활의 태도이며, 어른스러움이며,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존중하는 마음이다.

한 사회의 성숙도는 사람을 얼마나 제대로 대접하고 키우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저 고운 단풍이 저 홀로 물들 수 없는 이치에서 배워야 한다. 타인에게서 나를, 나에게서 타인을 보는 ‘균형 잡기’ 훈련 같은 것.

<조선일보, 2000-10-21, 이경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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