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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역을 위해 감리교 수장직을 포기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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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역을 위해 감리교 수장직을 포기한 사람

예수에 목숨을 건 조지 휘트필드
 
-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18세기에 일어난 기독교 대각성운동의 최고 공로자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1714년 영국 글로스터에 있는 한 여인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이 그곳에서 조그마한 여인숙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그는 드라마에 관심과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학교에서 열리는 연극제에 많이 출연했으며, 그가 살고 있는 동네 어른들이 연극을 배우려고 그를 연설자로 초청할 정도였다.

그러던 중 15살 때 여인숙에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학교를 중퇴했다. 중퇴 이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친척들의 권면으로 옥스포드 펨브룩 단과대학에 입학, 학교 사환 노릇을 하면서 어렵사리 학업을 계속했다. 그때 그에게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갈급증이 크게 일어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으며 하루에 두 차례씩 공중 예배에 참석하는 등 교회 생활에 열정을 보였다.

그는 당시 존 웨슬리가 옥스포드 대학교 안에 세운 홀리클럽에 가입해 본격적인 기독교 운동에 가담했다. 클럽의 학교 선배들에게 성경을 배우고, 영적인 교제를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휘트필드는 그를 예수께로 인도해 줄 기독교 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3년 후인 21세 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회심한다.

회심한 휘트필드는 안 글로스터의 주교를 만나 사제 서품을 받고, 1736년 6월 27일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3년간의 목회 동안 그는 늘 성경 중심의 복음적인 설교만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고, 사방에서 종교 집회를 열어 그에게 설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교회 목회자들은 대중에게 인기가 있던 그를 시기해 강단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1739년부터 교회당에서 설교하는 전통을 벗고, 옥외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옥외 설교에서 휘트필드는 매우 감성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의 설교에는 자기 자랑이나 신세 타령이 없었다. 설교에서 세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복음과 구령의 열정을 위해 사는 사람처럼 설교했다. 하나님 품에 자신을 내던지고 그 분의 이끄심을 기꺼이 좇아간 사람으로, 완전히 성령에 취해 설교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어떤 때는 매일 8천명 이상이 한 달 이상 몰려드는 기적도 일어났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도 활동했다. 1740년 2차 미국 방문시에는 조지아에 보육원을 설립했으며, 순회 설교로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다. 특히 그의 노스햄프턴 교회(장로교 조너선 에드워즈 목사)에서의 설교는 미국 개신교 부흥운동 중 하나인 1차 대각성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 처음에 그는 같은 대학 동창인 존 웨슬리 목사와 동역했다. 그는 웨슬리 목사를 “앞으로 죽어서 천국에 가면 주님 곁에 제일 가까이 있을 사람”이라 칭찬하고 매우 존경했다.

존 웨슬리 목사가 노예해방 문제 같은 민감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가질 때, 조지 휘트필드 목사는 아동복지 문제 같은 구제 분야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존 웨슬리는 성공회 성도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노예해방 운동을 적극 격려했고, 조지 휘트필드는 보육원 기금 마련을 위한 설교에 더욱 적극성을 보였다. 휘트필드는 기성 교회에서 배제된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가르치고 설교했다. 그들은 휘트필드의 그런 설교를 듣고 감동했으며, 크리스천으로 회심하기도 했다. 탁월한 두 지도자의 목회 비전은 서로 달랐지만, 영국과 미국의 교회를 복음적으로 부흥시키고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조지 휘트필드는 동역자 요한 웨슬리와의 분열을 막기 위해 감리교의 수장이 되는 것을 포기하기도 했다. 휘트필드가 수장직을 포기한 것을 놓고 그의 추종자들은 장차 휘트필드의 명성이 교회에서 사라질 것이며, 후세에 까맣게 잊혀질 것이라 우려했다. 그때 휘트필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조지 휘트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사람의 발길 아래 짓밟히게 하라.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수 있다면, 나의 이름을 모든 곳에서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조차 나를 잊게 할 것이다. 칼빈은 무엇이고 루터는 무엇인가? 이름과 분당 그 이상의 것을 보라. 오직 예수로 진리의 모든 것을 삼아야 한다. 그 분만이 전파되도록 해야 한다. 나는 누가 제일 윗자리에 있는가에 관심이 없다. 설령 그것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자리일지라도, 나는 내 명성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만족하며 기다릴 것이다.”

찰스 스펄전은 “조지 휘트필드와 같은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것은 결코 끝이 없다. 종종 그의 생애를 읽을 때 어느 부분을 펼치든 즉각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휘트필드의 모든 삶은 불이었고 날개였으며 힘이었다. 주님께 순종하는데 있어 내게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조지 휘트필드”라고 평가했다.

휘트필드는 1770년 미국 보스턴으로 여행하던 중 엑세터의 어느 여관에서 한밤중에 몰려든 청중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지만, 자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든 청중들에게 창문을 열고 촛불을 든 채 촛불이 꺼질 때까지 열정적으로 설교했다.

그의 고단한 육신은 미국 매사추세츠 뉴베리포트 교회 묘지에 묻혀 오랜만의 쉼을 얻었다. 영국에서는 1770년 11월 11일 휘트필드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그의 친구 요한 웨슬리가 눈물로 장례 설교를 했다.

“어느 누가 그처럼 수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초청했으며, 그처럼 많은 죄인들을 회개시켰다는 말을 읽거나 들은 적이 있는 가? 어느 누가 그처럼 많은 사람을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하고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도구가 된 사실을 듣거나 읽은 적이 있는가?”라고 울부짖었다.

무려 13회나 대서양을 넘나들며, 18,000회에 달하는 대중 집회에서 순수한 복음만을 전한 하나님의 사람, 조지 휘트필드.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목소리는 21세기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살아 울리고 있다.

세상은 바뀌고, 세월은 가도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힘이 있고, 영원하다. 자신의 명예와 부와 칭찬과 권력을 모두 벗어던지고, 오직 예수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조지 휘트필드는 오늘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신다.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서는 직접 빵을 주면서 열정적으로 말씀을 선포했던 조지 휘트필드의 목회관이 21세기 오늘에도 살아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역동적인 공동체이지만, 국가가 미처 돌볼 수 없는 가난한 영혼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힘들고 어려운 이웃을 행해서 빵을 주는 것도 참된 복음이요, 예수가 원하는 복음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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