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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고난은 동일하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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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동일하다. 그러나 고난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는 말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의 말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고난이 다른 이유는 우리의 고난이 죄값으로 인한
징계의 결과라면 주님의 고난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중보적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롭고 쓰라린 아픔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신 이유는 그 고난 속에 인류 구원의 값진
보화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 한 걸음 한 걸음 죽음의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그것도 겸손과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회피하지 않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은 축복을 가져다주는 지름길”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말은 결코 허구가 아닙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우리 주님을 향하여 수많은 사람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광적으로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찬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의 환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고난 때문에 주님의 발걸음은 무거우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장사하며
돈 바꾸는 자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셨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다음날 예수님은 감람산 위에서
자기를 시험하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에게
세금 문제와 죽은 자의 부활과 율법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베다니로 돌아가신 주님은 셋째날을 맞아 온종일 쉬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날을 침묵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베다니에서의 주님의 침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간계와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측하시면서도 베다니에서 온종일 계시면서 침묵으로
일관하신 데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침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침묵 속에는
언어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토머스 칼라일은
“침묵은 말 이상으로 웅변적이다. 연설은 위대하다.
그러나 침묵은 더욱 더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베다니에서 하루를 쉬시면서 장차 겪게 될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이는 침묵이 결코 무의미하거나 소모적인 행동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침묵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행위였습니다. 베다니에서 온종일 침묵하신
주님의 행동은 많은 의미를 지닌 말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의 침묵은 현실을 수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큰일을 앞에 두고 휴식하는 ‘쉼’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구속을 위하여
주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대속의 제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계셨고 또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속의 대명(大命)을
감당키 위하여 쉼을 통해 힘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쉼표가 없는 음악은 음악이 아닙니다. 쉼이 없는
신앙 역시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은 공생애 기간에 자주 한적한 곳을 찾아
쉬시면서 또 기도하신 것입니다(막 1:35).

쉼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제7일에 쉬셨습니다(창 2:1∼2).
쉼은 사역의 전제조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쉼에 철저하셨고
또 이를 통하여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이렇듯 쉼은 우리 인생의 활력소이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주님에게 베다니의 침묵은 이렇듯 매우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이루려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수용하시고 이를 위해 쉼과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승리는
침묵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비디우스는
침묵을 금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말로 설득하는 대신 침묵의 힘으로 설득하십시오.
그것은 말보다 침묵이 더욱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위스인들은 웅변은 은,침묵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길자연 <왕성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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