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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딸의 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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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숨소리 

한 남자가 황급히 진찰실 문을 열고 내 의사도 묻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이 창백해 가지
고, 안고 있는 어린이를 건네면서, 숨이 넘어간지도 모르겠다고 다급한 어조로 말하였다. 나는 진
찰하던 환자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그 남자에게로 가 어린이를 받았다.

남자의 옷차림과 어린이의 까무러친 표정으로 보아 교통사고라는 것을 직감했다. 어린이를 곧 침
대에 눕히고 청진기를 댔다. 순간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새하얗게 질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여자아이는 분명히 네살박이 내 딸이었기 때문이다.

청진기를 잡은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의 숨소리를 잡기 위해 청각을 곤두세웠으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절망의 바람이 일었다. 인공호흡으로 숨을 불어넣
고 빨아올렸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의 몸은 점점 더 차가와지며 굳어져 갔다.

수만 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하듯 아득한 절망이 나를 휩쌌다. 나는 아이의 몸에 얼굴을 묻은 일
외에 그 후의 일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졸지에 귀염둥이를 잃어버려 아내도 아이들
도 넋을 잃고 있었다.

나는 병원문을 닫았다. 급한 환자라며 애원을 해도 모르는 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이 원망스
러웠다. 내 딴에는 선을 행하며 의롭게 살려고 노력해 왔는데, 결과가 이렇게 되고만 것이 허망하
기만 했다.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끝나버린 줄 알았던 영혼의 방황이 다시금 시작된 것이다. 신
앙도, 인생관도, 의술에 대한 신념도 모두 새롭게 정립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날만 새면 아이 무덤으로 가서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가 목을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덤을 찾았을 때, 아이의 재롱부리던 모습이 떠올라 어느 때 보다도 가슴을 저리
게 하였다. 허탈한 마음으로 무덤에서 일어섰을 때는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내려오는 길에 블럭
으로 지은 허술한 집들의 산동네가 쓸쓸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동네로 접어들어 10여 걸음 걸
었을 때 갑자기 어린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울음 소리는 고통에 못이겨 우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울음 소리가 나는 집으로 달
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얼굴이 수척한 여인이 우는 아이를 달래며 안고 서 있었다. 어디
가 아파서 그러느냐고 묻자, 그는 내 얼굴을 살피며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점심 때가 되어 공장에서 돌아와 보니 보채며 울더라고 말하였다. 그 아이는 내 죽은 딸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진찰을 해 보니 급성 폐렴이 분명하여, 그 애를 받아 들고 친구의 병원을 향
해 달렸다. 그리고는 빨리 손을 써 달라고 하였다.

다행히도 그 아이는 상태가 좋아졌다. 그 후 친구에게 가끔 들렸고, 그 아이는 상태가 호전되어 퇴
원하게 되었다. 고맙게도 친구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어머니에게 이제는 내 병
원으로 와서 치료를 계속하라고 일렀다.

퇴원 한 다음 날 그녀는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아 왔다. 진찰실로 데리고 가 청진기를 대자, 규칙
적으로 맥박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 속에서 나는 내 딸의 숨소리를 들었다. 한동안  그 소리를
듣느라 넋이 나간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환자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우쳐 주었
을 때 비로소 청진기를 떼었다.

나는 간호사와 함께 상태가 급한 다른 환자를 돌보았다. 그리고는그 아이에게로 돌아와 또 한 번
진찰을 하였다. 청진기로 들려오는 맥박소리는 죽은 딸의 그것과 같은 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소리에서 이제까지 쌓아 온 내 인생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히포크라테스의 엄숙한 선서
와 신앙의 외침들이 내 영혼을 흔들었다.

생명을 살린다는 자부심으로 살아 왔으되, 벽에 갇히어 자신만을 위하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
다. 나는 여인에게 아이의 상태가 좋아졌으니, 약을 가지고 갔다가 내일 또 오라 하였다. 그리고
주전자를 들어 냉수를 한 컵 따라 마셨다.

아이를 보내놓고 나자  걷잡을 수 없는 회의와 갈등이 엄습해 왔다. 여느 때 같으면 차라도 한 잔
마시며 쉬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컨디션이 좋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고개를 저었다. 새 환자가 들어 왔고 환자는 또 들어 왔다.

환자가 뜸해졌을 때 진찰실을 나왔다. 어둠이 깔린 하늘에는 별들이 빛나고, 그 속에서 딸의 숨소
리가 또 들려 왔다. 빛나는 별빛 아래 그 숨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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