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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고려청자 재현에 바친 유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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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재현에 바친 유근형 

저마다의 분야에서 그 이름을 떨친 사람들을 보면 한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이 분명했다는 것과 그 길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려청자 재현에 인생을 바친 해강 유근형도 그런 사람이었다. 경기도 이천에 가 보면 유근형의 체취가 남아 있는 '해강고려청자연구소'와 '해강도자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가 도자기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서울 보성학교의 졸업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창경궁으로 소풍을 간 그는 고려청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는 생전에 그 일을 가리켜 "하나님이 나에게 갈 길을 안내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려청자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선생님의 설명도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고 딱히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도 없었다. '해강(海剛)'이라는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정도에서 물러설 유근형이 아니었다. 보성학교 시절, 그의 담임선생님은 뭐든지 끝까지 해 내고야 마는 유근형을 보고 '해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면서 "바다는 넓다. 씩씩하고 굳세게 자라라" 하는 말을 해 주었다.

유근형은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연천에 있는 그릇 공장을 방문했다. 1911년 한양고려소에 취직할 무렵 그의 나이 18세였고, 그는 이미 그때부터 계속 자라오던 외가에서 독립해 본격적인 도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요장에서 만난 일본인 이시다와의 경쟁 관계에서도 그는 학질에 걸리면서까지 부탁받은 술잔을 구워 내는 열심을 보여 주위로부터 인정받기에 이른다.

당시 유근형의 관심은 온통 도자기뿐이었다. 차를 타고 다니면 흙을 알 수 없다며 일부러 먼길을 걸어서 다녔고, 고려청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깊이 배울 수 있는 기회만 생기면 어디든 달려갔
다.

드디어 1920년 그는 고려청자를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600년 동안 단절되어 있던 고려청자가 다시금 맥을 잇고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가 재현해 낸 청자는 빛깔과 문양은 물론, 고려인들의 정갈하고 세련된 멋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세계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평생을 던진 사람, 그 꿈을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꿋꿋이 외길을 간 사람, 유근형에게는 고려청자를 재현해 낼 수밖에 없는 힘이 있었다. 한 개인이 품은 꿈이지만, 그것은 한 나라의 맥을 다시 찾아 주었고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든든한 삶의 지표가 되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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