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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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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보다 중요한 건 방향이다

- Sergei(모스크바 선교사)


아버지와 아들이 등산을 갔다. 높은 산이었고 길 주위에는 빽빽한 나무들이 우거져 길을 구분하기 어려운 힘든 산이었다. 등산을 하다가 앞을 잘 보지 않아서 길을 잃었다. 아들의 얼굴은 창백하여 불안하였다.

아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나침반만 바라보며 방향을 확인하는 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아들은 “이러다간 평생 이곳을 못 벗어날 거예요”라고 불평하였다. “아버지 좀 더 빨리 걸어야 하겠어요. 발걸음을 재촉하세요”.

그 때 아버지는 오른팔을 뻗어 가리키며 “얘야 이쪽이다. 우리는 다른 방향의 길을 걸었던 거야”라고 했다. 방향을 바꾸어 한참을 걸었던 두 사람은 목적지인 산 정상에 도착하고, 무사히 하산하였다. 하산한 후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얘야, 시간보다 더 소중한 것은 방향이란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라”(낮은 울타리 2004.8월 발췌)


미래선교의 방향설정

나는 한국 선교가 이제 뛰는 일에 쉼표(,)를 찍고 다시금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숫자적인 목표에 열을 올리고 달려왔다. 하드웨어 구축에 정신 없이 힘을 쏟아 붓고, 입이 무성한 무화과 나무처럼 외형을 갖추는 일에 온 정열을 다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미래 선교의 방향을 바로 잡는 일이다. 우리 선교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고 이제는 적어도 방향을 분명하게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큰 그림만 그리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이번 러시아 장로교 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현지에 교단을 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로교 목사로서 장로 한 사람 세우려는 생각을 못하였다는 것이다. 장로교의 좋은 전통과 역사와 신학을 함께 나누는 의미에서 매우 귀한 일인데 미처 생각을 못한 것임을 이번 기회를 통하여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특히 러시아 선교 20여년을 바라보면서,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하였는가 자책감을 갖게 된 것은, 현지인들에게 리더십을 세워주기 위하여 모스크바에서 모임을 구성하는데 정작 스스로 키운 목회자가 거의 없어 세울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모두의 고민이었다.

전체를 볼 때에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까지 한국 선교사역은 대체적으로 교회개척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하여 왔다. 그래서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온 것이 아닌가 판단한다(언제나 다 그런 것은 아니기에 오해가 없기를…).

이제는 사역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속히 전환을 이루어야 할 때이다. 일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건물 중심에서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현실 중심에서 미래 중심으로, 보여주는 성과주의에서 먼 미래를 바라보는 사역으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선교의 성패는 몇 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세웠느냐가 아니다. 얼마나 신실함+능력을 갖춘 사역자를 양성하였느냐 이것이 선교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선교관 수정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려면, 한국교회의 선교관도 대폭적인 수정과 보완이 필요하다. 성과주의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여야 한다. 사람을 키우는 일은 성과로 보기에 매우 부족하다. 일반적으로 교회 개척 숫자 혹은 성도가 얼마나 모이는가로 평가하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너무나 근시안적인 판단이다.

또 이런 예도 있다. 한 교회가 어느 지역에 집중적인 지원을 하다가 교회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았다든지 문제가 발행하였을 경우,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실망과 함께 좌절하여 선교의지가 꺾이고, 선교에 열정적이던 교회가 부정적인 교회로 전환하였다는 이야기를 여러 곳에서 듣는다. 오늘 한국교회의 태도는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경우 곧 바로 실망과 좌절로 나가는 것을 보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선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본다.

바울은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낙심케 한 사단을 기쁘게 할까 봐서 그랬다. 복음의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하여서도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아야 한다. 하물며 사람들에게 생명과 진리를 가르치고,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하며, 인류 역사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일에 어찌 실패가 없겠는가? 어찌 실망과 좌절, 눈물과 아픔이 없겠는가? 충분히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바르게 나가게 되고, 방향을 잡거나 목표를 설정하는 일에 유익이 된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이러한 방해나 실패가 없는 것이 오히려 더 화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의 복음의 역사는 수없는 피를 불러왔고, 수많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의 선교는 많은 환난과 근심 속에서 동족에게 속고 당하고, 생명을 거두려는 자객들의 위험을 당하면서 진행되어 왔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이다. 어찌 우리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숫자적으로 성장하고, 우리의 소원대로 되면 성공한 선교사역이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로 쉽게 단정지어버리는지 하나님의 관점은 오간 데 없어 답답한 일이다.


나는 이런 정책 제안을 해본다

첫째, 한국의 선교의 패턴은 교회중심 사역이다. 이것을 정책적으로 수정하여야 한다고 본다. 교회사역이 아니면 할 것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닌가? 선교사역의 핵심은 교회이다. 결론도 교회이다. 교회가 선교의 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교사를 통한 것보다는 선교사가 길러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이렇게 정책적인 배려와 훈련이 있어야 한다.

교회사역뿐 아니라 모든 사역의 부분에서 사람을 키워 일하게 하고, 어는 정도는 앞에서, 그리고는 함께, 나중에는 뒤에서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선교사는 나서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제안에 반대 의견도 많이 들었다. 실제적으로 목회를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곳이 많은 것을 안다. 그것은 예외로 하고라도 일반적으로 한국선교의 방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선교사는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사람이다. 병들면 떠나야 하고, 본국에서 후원이 중단되면 떠나야 한다. 또한 현지 정부의 정책에 따라 떠날 수도 있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을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고 사역하여야 한다. 본인 떠나면 얼마 가지 않아 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본인과 의사와 관계없이 매우 정직하지 못한 사역의 결과를 가지고 온다.

둘째, 이러한 일련의 정책과 훈련은 당연히 한국 선교훈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행기 타고 떠난 이후, 컨트롤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뒷북 치지 말고 미리 예상하고 점검하여 사전에 교육하여야 한다. 오늘의 시대는 예방시대가 아닌가? 이제는 모두 시행착오도 많이 겪고 경험도 많이 있으니, 예방차원에서 모든 일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 교단 선교 정책도 현지에 맞게 적용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사역자 재 배치 정책도 그 하나일 것이다. 이론과 실제는 너무나 현격한 일이다. 재배치의 개념을 이곳 저곳으로 흩어 놓는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좀더 실제적인 일들이 되려면, 훈련원에서 가르치고 감각을 깨워야 한다. 훈련원에서 정책과 선교의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그러면 오히려 역으로 현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말이 있지 않는가? 썩은 손톱 빼내려 하면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새 손톱이 자라면 썩은 것은 자동적으로 빠져나간다. 이것이 현명한 일이다.

모든 현장의 문제는 훈련되지 않는, 그리고 감각되지 않는 자들로부터 일어난다. 현재 모든 필요한 분야의 문제는 대부분 보고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구체적인 대안과 방향을 찾아 나가는 것이 선교 대국을 이루기 위한 과제이다. 이것이 한국선교의 희망이라고 본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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