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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는 어떤 가장이 되어야 할까?…아버지들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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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가장이 되어야 할까?…아버지들의 고민

돈만을 버는 사람이 가장인가 사랑과 희생의 주체가 곧 가장 


IMF때보다 더 극심한 경제난과 함께 가정불화도 더욱 극심해 지고 있다. 2009년 1월 8일 가장 많이 본 뉴스의 탑 순위 안에 <‘남성의 전화’를 가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평소에 아내와 자녀들에게 가장으로써의 신뢰도가 없던 가장들이 경기침체로 인해 경제적인 능력마저 잃어버리자 아내는 이혼요구를 하고 자녀들은 본체만체한다는 것이다.

가족해체의 위기에 내몰린 가장들이 남성들의 고민을 무료로 상담해주는 ‘남성의 전화’에 상담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경기침체로 숨겨져 있던 가장들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가장은 가정에 돈을 벌어다 주는 존재만은 아니다.

요즘 사회가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으로써 Frendy(Friend+daddy프랜디; 친구같은 아빠)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내들도 남편이 재정적인 조력자만이 아닌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원한다. 눈치 빠른 가장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내와 자녀들이 가장들에게 원하는 것은 친구와 나누는 것과 같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내와 자녀들은 가장들과 우정과 같은 사랑을 나누기를 원한다. 우정과 같은 사랑이란 무엇일까? 친구와 있을 때 마음이 어떠한지 살펴보면 된다. 친구와는 동일선상에 있다. 친구가 나와는 수준이 낮은 존재라고 여기거나 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다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펴봐야 한다. ‘아내는 내가 겪었던 일을 말해도 이해를 못 할 거야.’, ‘애들이 뭐를 알겠어. 라며 높아진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는가? 높은 마음으로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다. 아이들이 “쟤는 혼자 잘났어.” 라며 왕따를 하듯이 가정에서 왕따가 된다. 가장들은 텔레비전만 쳐다보며 홀로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가장이란 가정의 머리이기 때문에 아내와 자녀들과 동일선상에 있을 수는 없다. 가정의 질서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정과 같은 사랑을 가정에서 나누기 위해서는 가장들은 예수님을 보고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가장 높으신 분이시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장 5절~8절)” 예수님의 마음만큼은 인간보다 높지 않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낮아지셨다. 겸손해지고 낮아지기가 쉽지 않다.

특히 가장들은 밖에서 일을 한 후 집에 돌아오면 쉬고 싶지 집안일은 도와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을 돌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돌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행동을 하셨다. 영혼구원을 하시고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베드로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현대 사회의 가장보다 더 지치고 피곤하셨다. 하지만 가장들은 집 밖에서는 힘들지라도 집에서만큼은 쉴 수 있다. 적어도 머리에 베개를 베고 잠을 잘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머리조차 어느 한 곳에 둘 수 없다고 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태복음 8장 20절)” 쉬실 수 있는 기회인 식사시간 때도 일어나셔서 베드로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셨다.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요한복음 13장 6절~7절)”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제자들을 깊이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을 베드로만 받았는가? 가장들도 베드로의 자리에 있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셨듯이 예수님께서는 가장들을 돌보시는 희생을 하고 계신다. 가장들은 가족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느껴야 한다.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뿐만이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생각해보라. 그러면 아무리 집밖에서 마음과 몸이 힘들었어도 가족들과 대화를 하며 사랑을 나누고 싶어진다. 현대 사회의 가장들은 바쁘게 일을 하면서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기쁨을 잃기가 쉽다. 

2008년 12월에 조선일보는 ‘21세기 아빠들이 사는 법’을 3회에 걸쳐 기사에 실었다. 그 기사에서 노르웨이에 사는 신문사 베게(VG)에서 일하고 있는 프레데리크 킬랜더(Kilander·34)씨가 나왔는데, 그는 두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각각 4개월간 아버지 휴가(father leave)를 썼다. 그는 “굉장한 경험이었죠. 아이들이 아프거나 고민이 있을 때 엄마가 아니라 저에게 달려올 땐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라는 고백을 하였다.

또 중국 상하이에서 금융 컨설턴트로 일하는 션 후와이 드어(48)씨는 유치원에서 두 아이를 데려오고 밥을 먹인 뒤 함께 놀아주는데 “애들이 아빠를 필요로 하니 행복할 뿐이죠.“라는 고백을 한다. 그 가장들은 가족원들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였지만 정작 행복하고 기쁜 것은 자신들이었다. 사랑의 기쁨을 맛본 션 후와이 드어씨는 아내가 한 달 평균 10일씩 출장 가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다고 한다. 

인간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 때 가장 기쁘다. 가장들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들이 진정한 행복과 기쁨, 안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아내와 신혼 때 나누었던 사랑, 아내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해도 기쁘고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었던 때를 회상해보자.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기쁨을 누렸던 적이 있지 않은가? 그 기쁨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가족들이 원하고 사회가 원하는 가장의 역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들의 영혼이 원하는 가장의 모습이다.

희생적인 사랑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하던 일을 그만두라거나 집에서도 쉬지 않고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기저귀 갈아주기를 갈아주거나 밥을 한 숟갈 먹이는 것도 희생적인 사랑이다. 아내의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좋다. 집에 돌아와서 가만히 누워 텔레비전을 보기보다는 친구와 우정을 나누듯이 가족들과 사랑을 나누어 보자. 그럴 때 가장들이 비로소 가장으로써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 신앙과 가정재단 제공(www.ff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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