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예화 기다림의 은혜

첨부 1


기다림의 은혜

농부는 씨뿌림으로 추수를 기다리고
산모는 잉태함으로 출산을 기다리고
낚시꾼들은 미끼를 던짐으로 고기를 기다리고
목자는 피를 토함으로 성숙한 성도들을 기다린다.
그렇다. 인생은 기다림이며 지구력과의 싸움이다.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린다.
하루 하루가 기다림의 연속이다.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오기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 답장오기를 기다리고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쌀씻어 불지펴 놓고 뜸들기를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신앙생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며,
홀연히 임재하실 하나님을 기다리며 병 낫기를 기다리며,
문제해결을 기다리며, 믿음의 성숙을 기다린다.
그러나 기다림은 영적인 문제이다.
기다림을 방해하는 사단의 충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다려야 함을 알고도 기다릴 수 없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다.
기다림은 재미나는 놀이가 아니다. 기다림은 처절한 전투이다.
성경은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로 충만하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면,
잘 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다만 말씀에 의지하여 잘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무자함의 25년.. 자녀에 대한 기다림이 얼마나 힘들고 지루했을까?
모세, 외로운 광야에서의 40년.. 사명에 대한 목마름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 굴욕의 세월이었을까?
요셉, 상처와 억울함으로 얼룩진 13년.. 회복과 그리움으로
얼마나 심장이 터지는 통증의 나날들이었을까?
야곱, 실망과 시행착오의 21년.. 성숙과 축복에 대한 사무침으로
얼마나 험악한 세월이었을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기다림이라는 용광로에 던져 타오르게 하신 후에
결국은 녹아지게 하신다. 마지막에는 기다릴 힘도, 기다릴 이유도 제거하신 채로 말이다.
그냥 눈떴음으로 아침을 열고, 살아있음으로 살아내는 하루일뿐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우리는 기다림으로만 작아지고 정화될 수 있었다.
설렁탕에 사용할 진국을 우려내기 위하여 8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거품과 세속적인 기름기는 기다림으로만  제거되고 진국되어 질수 있다.
기다림에 대한 반대는 조바심이다. 조바심의 뿌리는 불신앙이다.
조바심은 사단이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하여 즐겨 사용하는 코드 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조바심에 집착하거나 중독 되면, 영적센서가 작동을 중지하거나 오작동하게 된다.
현재 우리에게 있는 쓴뿌리와 불행의 이유 중의 많은 부분들이 조바심 때문에 생긴 것이다.
또한 지금의 고난이 어쩌면 조바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르침에 대한 심판(?)일 수 있다.
그때, 좀더 기다렸으면.. 그때, 며칠만 더 기다렸다면..
그 때, 몇 달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뻔했던 일들이 의외로 많았던 것을
우리는 우매하여 지나고 나서야 깨달아 알게 된다.
기다릴 수 있음이 영력이다. 기다려지는 자체가 이미 절반은 승리한 영성이다.
기다림의 뿌리는 신뢰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만이 끝까지 기다릴 수 있다.
기도의 응답도, 전도의 열매도, 교회의 부흥도, 사람의 변화도, 문제의 해결도,
믿음의 성장도, 조바심을 몰아내고 기다릴 수만 있다면 내 손에 넣을 수 있다.
아브라함이 25년 동안 자녀를 기다렸듯이
하나님 또한 25년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 성장을 기다렸을 것이다.
누구의 기다림이 더 중할까?
우리도 기다림으로 지치고 힘들어하듯, 하나님도 우리를 향하여 동일하시다.
그래도 기다릴 수 있는 무엇이 있어서 좋다. 기다려야 할 일을 주심에 행복할 수 있다.
이 땅에는 기다릴 것도, 기다릴 사람도 없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
몸이 아프지만 건강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가난하지만 부요함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은혜이다.
교회가 부흥이 안되지만, 부흥을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무한 영광이다.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지만, 믿음 성장에 대한 기다림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운 일 아닐까?
가시 노릇하는 사람 곁에 있어도 성자 될 날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아닐까?
병든 자식 속썩이는 남편 곁에 있어도 그저 살아있음으로 다행이 아닌가?
기다림에 불평 않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성숙한 믿음이 아닐까?
밤중이 되면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는 것 때가 되면 고추장에 밥비벼 먹을 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은 밥상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매일 아프고 힘들지만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치유를 기다린다는 것
오랜 시간동안 찾아오는 교인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구름 같은 성도들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주체할 수 없는 즐거운 일 아닐까?
나의 가난함, 병듦, 부족, 실패, 연약함조차 부러워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 기다림으로 불평함은 오히려 사치가 아닐까?
기다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기다릴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하루를 주심에 감동하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림에 감동하자.
지독히 힘들고 어려운 삶일지라도 지극히 행복할 천국을 기다릴 수 있음에 즐거워하자.
응답도, 축복도, 부요함도, 풍성함도 못깨달으면
불평이나 수십년의 기다림으로도 깨달으면 감사이다.
성경은 '잠잠히 참아 기다리라' 하신다.
기왕 기다릴 것이면 입다물고 기다려야 한다.
투덜거림으로 기다림은 안 기다림 만도 못하리라.
선조들의 기다림의 날들을 세어보면
수년 동안의 기다림은 오히려 부끄러운 자랑일 뿐이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하나님을 묵상하며
악을 선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하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 기다림은 오히려 영광이 된다.
그날이 천년이라 할찌라도 말이다.
그러나, 기다림은 결심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나는 기다릴 수가 없다. 기다림에 실패한 흔적으로 충만하다.
그래도 기다리기로 결심하라. 그러면 기다릴 수 있는 새 힘을 공급하여 주실 것이다.
사단의 충동하고 조종하는 조바심과
'중단하고 포기하라'는 압력에 동의하지도 굴복하지도 마라.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오신다'는 말씀에 동의하라.
마침내 기다림으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또 다시 기다려야 하는 새해(2004)를 기회로 주신
사랑하는 주님으로 인하여 주체할 수 없이 행복할 수 있어 즐겁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