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쥐도 새도 모르게

첨부 1


쥐도 새도 모르게 
  
- 이동원 목사 (지구촌교회)
 

이런 유머를 들은 일이 있다. 여러모로 어두운 북한 현실을 풍자한 이야기다. 너무 심한 식량난으로 북한에선 쥐마저도 굶주리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북한의 쥐는 통행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아무데나 갈 수 있는 형편도 못된다고 한다. 그런데 쥐 가운데 지능지수가 뛰어난 친구에게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다고 한다. 새가 맘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미스 버드(새)를 꼬셔서 애인삼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쥐와 새는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둘의 사랑이 절정에 있을 때 영리한 쥐는 히든카드를 끄집어낸다. “미스 버드! 넌 아무데나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 당원들 집에 날아가 양식을 좀 구해오면 어떻겠느냐”고. 새는 염려 말라고 하며 당장에 한 당원 집에 날아가 적지 않은 양식을 구해가지고 왔다고 한다. 오랫동안 굶주린 쥐는 이 엄청난 양식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쥐도 새도 모르게 먹어 치웁시다.” 

쥐뿐 아니라 인간도 당황하면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잊고 인생을 사는 것이다. 성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루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인 된 우리들, 그래서 우리는 정녕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인생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왔을 때 우리는 거기서 우리 죄를 대신한 예수의 피 흘림으로 죄 사함 받고 은혜 입은 자들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예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라고 가르친다. 인생의 궁극적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면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는가? 이제 우리는 고개를 들고 주를 맞이하고 주를 찬양해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얻은 성도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이제 택함 받은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나라에 소유된 백성들이다. 

성도의 삶은 축제이다. 하늘나라는 어떤 임금이 베푼 큰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인도 심판의 대상도 아니다. 우리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잔치할 필요가 없다. 잔치를 선포하고 굶주린 우리의 이웃들, 쥐 생원과 미스 버드를 모두 초청해 함께 즐기자고 말해야 한다. 목마른 자도 배고픈 자도 모두 오라고 초청해야 한다. 교회는 축제의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날은 추워지지만 신명나게 잔치를 시작할 때이다. 

- 출처 : 국민일보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