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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꼴찌를 일등 생각한 -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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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를 일등 생각한 아버지 (진상우, MBC 여성시대 신춘 편지 우수상 수상작)

아버지가 그리워질 때면 꿈 속에서라도 한 번 뵐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아내 몰래 베개 밑에 아버지 사진을 넣고 잔 적도 있었건만 아버지는 번번이 나를 만나러 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애써 떠올릴 때마다 숨어 막힌 듯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져 왔다.

그런데 간밤 꿈 속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만났다. 떠나시기 전에 입고 계시던 병원복을 그대로 입고 계신 아버지는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신 채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다 알고 계시는 듯 말씀하셨다.

"상우야! 니도 내 자식이다. 니도 인자 애비가 되니깐 애비 마음을 알겠제! 늙어 죽어서도 가슴에 묻고 가는 게 자식인기라! 아버지는 니를 믿는다. 상우야…."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베갯잇이 축축하게 다 젖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이 다 후련했다. 그 옛날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한꺼번에 다 보상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도 조금 삭여진 기분이 들었다. 마치 아버지는 내 마음의 병을 치유해 주기 위해 오신 것처럼 내 아픈 속을 일일이 다 후벼주고 가신 듯했다.

아버지, 내 아버지는 농부였다. 평생을 남의 땅을 소작하는 일로 시작해서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일한 대가로 당신의 명의로 된 농지를 얼마 사들였고 비로소 삶의 여유를 조금 찾게 되었을 때 교통사고로 몇 년 동안 의식없는 병원생활을 하시다 세상과의 연줄을 끊으셨다.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에게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동네에서 늘 전교 일이등을 하며 수재로 잘 알려진 형과 손재주가 뛰어나고 머리가 영특한 동생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미운 오리 새끼에 불과했다. 형에게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동생에게서 받는 상처받은 자존심은 늘 나를 일찍부터 밖으로 나돌게 했다. 그러다 둥지 속으로 날아드는 어린 새처럼 가족의 사랑이 고파서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나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형만도 못한 아우, 동생 보다 못한 형일 뿐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거리의 형들과 친구를과 어울리며 일찍부터 술과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고, 그나마 고등학교는 어머니의 순물로 힘겹게 간신히 재수 끝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학교 성적 따위는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 학기가 끝나고 성적표가 집으로 도착하는 날이면 아버지는 마당에 세워둔 지게 작대기를 두들겨 댔다.

"이 녀석아, 애비처럼 땅 파 먹고 살라꼬 그라나! 전교에서 꼴찌가 뭐꼬 꼴찌가!  아니다. 니같은 놈은 땅도 못 파먹고 살 놈이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시험을 볼 때마다 백지로 제출했으니 전교 꼴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와 이랍니까? 아 죽이겠습니다!"

옆에서 만류하는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나는 정말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 그 후에도 여러 번 있었다.

"니는 전교 꼴찌에서 모자라서 앞으로 니 인생에서도 꼴찌를 하고 싶으면 계속 못된 짓하고 다니거라." 내 인생에서 꼴찌라는 아버지의 호된 말에 나는 잠시 가슴이 멍해져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서러운 마음을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한테 내는 자식도 아닙니꺼? 형한테 하는 거 민우한테 하는 거저한테 반만 해 주시면 제가 꼴찌하고 다니겠습니꺼!"

하지만, 아버지는 더 이상 내 말을 듣지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긴 한숨만을 내쉬며 집 밖으로 나가셨다. 그 이후에도 나는 계속 젊음을 탕진하고 돌아다녔다. 수업료로 밤새 술을 마시다 싸움박질을 하고 경찰서로 가는 일이 허다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나를 포기하신 듯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매질조차 하지 않으셨다.

차라리 지게 작대기로 매를 맞을 때는 그래도 내가 아버지 자식이라는 느낌이 들었건만 아버지의 무관심에 나는 황량한 벌판에 내몰린 듯했다. 그리고 며칠 뒤 결국 어머니에게 죄송하다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긴 채 가출을 했다. 무작정 집을 나온 나는 학교에 자퇴서 내고 몇몇 친구의 집을 번갈아 가며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술을 마시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솟구칠 때마다 주먹질을 하고 다녔다. 아버지 말처럼 나는 학교에서의 꼴찌를 그만 두었건만 꼴찌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변함없이 밤새 술을 마시고 친구 자취방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을 때쯤 동생 민우의 다급한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았다.

"형, 아버지가 다쳤어. 형, 아버지가 의식이 없다구. 빨리 일어나! 빨리!"

아버지는 비료를 사기 위해 시내에 나가셨다가 횡단보도를 무시한 채달려든 뺑소니 승용차에 사고를 당했다. 뇌출혈을 일으킨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도 의식이 들어오지 않은 채 산소호홉기에 생명을 지탱하고 계셨다. 의사는 우리 가족에게 아버지의 생명을 기약할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병상에 있는 동안 우리 가족은 웃음을 잃었고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원망할 수 없었다.

"아버지, 일어나이소! 일어나이소! 아버지 마음에 들게 다시 한번 살아보겠습니더! 아버지! 꼴찌 안 하고 형처럼 일등 하는 거 한 번 보여드리고 싶단 말입니더. 와 저한테는 기회를 안 줍니꺼? 아버지 지 말 들리면 제발 좀 일어나이소!"

차갑고 딱딱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는 울부짖었다.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기만 한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다시 학교를 나가고 전교 석차 꼴찌가 아닌 일등의 성적표를 아버지 앞에 정말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 용서하이소! 제가 잘못했습니더…."

그때 분명히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어 맺혀 흐르는 것을. 아버지, 아버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내 말을 듣고 계셨던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이 형편없는 꼴찌 자식에게도 기회를 주시는 거라고 말이다.

다음 날 학교를 찾아간 나에게 다행히 담임선생님은 그렇지 않아도 졸업이라도 시키고 싶었다며 잘 왔다며 자퇴서를 보류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졸업을 앞둔 그 해 한 학기 동안 친구의 도움으로 처음 공부라는 것을 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술 때문이 아닌 꼴찌 성적에서 탈피하기 위해 밤을 새웠다. 그 결과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의 내 성적표는 반에서 20등이었다.

빨리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던 나는 학교에서 병원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날 아버지에게 내 성적표을 영원히 보여드릴 수 없었다. 병실 문을 열자 어머니와 내 형제들의 통곡 소리가 돌려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 가슴 위에 내 성적표를 가만히 올려드렸다.

"아버지, 지 이번에는 꼴찌 안 했다 말입니더! 아버지 보여줄라꼬 이렇게 뛰어왔는데 이렇게 가시면 우이 합니꺼! 아버지 저 인자 꼴찌 그만 할랍니더. 공부라는 거 한 번 해봤더만은 할 만 하데예"

그칠 것 같지 않은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며칠 뒤 어머니는 나에게 흰 봉투 하나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너거 아부지, 겉으로는 니한테 매정스럽게 했어도 밤낮 니 걱정뿐이었다 아이가! 니는 순해서 넘 좋은 일 하고 다닐 것 같다꼬, 사내놈이 약하면 안된다꼬 일부러 니한테는 더 모질게 했는기라! 그거는 아버지가 사고나기 전에 벌써부터 니 앞으로 명의변경 해놓은 논문서다. 너거 형이나 민우한테는 하나도 안 남기고 전부 니 앞으로만 해놓았는기라! 상우야, 아부지가 그러더라. 니도 당신 자식인데 분명히 마음 잡을끼라고. 아부지 마음 알 수 있겠제!"

학교에서 꼴찌만 하는 자식이 세상살이에서까지 꼴찌하며 밥 못 벌어먹고 살까봐 끝내 염려스러웠던 아버지는 그 꼴찌자식에게 당신의 재산을 유산으로 다 남기셨다.

아버지, 내 인생에 있어 아버지는 전부였다. 아버지 때문에 꼴찌를 하고 아버지 때문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떠났지만 나는 아버지로 인하여 꼴찌 인생이 아닌 모범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지식이 꼴찌든 일등이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다. *


- MBC 라디오 "여성시대" 2002년 5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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