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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조지 휫필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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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8세기 영국, 국가로부터 녹을 받는 설교자들이 주일에는 설교문과 기도문을 읽고 나머지 6일은 저급한 세상 생활을 하고 있었을 정도로 종교가 깊은 침제의 늪에 빠져 있던 그 당시, 조지 휫필드는 능력 있는 설교로 마지막 죽는 날까지 대부흥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글로스터의 중상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정식으로 임명된 성공회 성직자였으나 그의 설교의 대부분은 옥외에서 행해졌다. 전기 앰프가 없었던 당시에도 그의 회중은 일천 명을 넘어섰다. 그는 22세에 시작하여 55세에 사망할 때까지 하루에 서너 번씩 설교를 하였다. 그는 영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처음에는 탄광 광부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때 수천 명의 회중이 모여들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의 검은 뺨에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의 도랑을 보면서 그들이 은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곧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는 철저한 통회로 나타났다." 1740년 24세의 나이로 미국에 두 번째 방문한 조지 휫필드는 조지아에 고아원도 설립하였다.
미국의 재상 벤자민 프랭크린은 휫필드에게 가장 관심깊은 청중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프랭크린은 휫필드의 감화로 필라델피아 전체가 신앙적으로 변모하는 것 같다고 전하면서 특히 휫필드의 힘 있는 설교에 감탄하였다.

그가 모든 인류에게 전했던 핵심적인 메시지는 "여러분은 거듭나야만 합니다"였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으나 그는 그들의 반대를 오직 애정으로 대했다.
그는 매우 부지런한 삶을 살았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함께 지내고 이어서 5시에는 설교하였다. 수백 명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 이른 시간에 모여들었다.
존 뉴튼은 "이 시간이 되면 무어필즈가 제등(提燈)으로 덮이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마치 극장가에서 오페라의 밤에 횃불로 가득차 있는 것 같았다"라고 진술했다.

그는 어디든지 그가 머물게 되는 집안의 누구에게라도 설교함으로써 하루를 마감하였고, 10시까지는 잠자리에 들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22세부터 그가 기력이 소진되어 설교할 수 없을 때까지 힘써 복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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