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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낮은 곳에 계신 주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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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에 계신 주님 (上)
 
- 문경주 집사 (여, 54세, 평화교회, 경기도 가평) -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우리 가문은 대대로 기독교 가문으로서 외할머니께서는 이북에서 전도사님으로 헌신하시기도 하셨고 외할머니의 영향을 받으신 어머니 또한 교회의 기둥이 되어 늘 교회와 목사님 편에서 앞장서서 일하셨다. 가정의 그런 분위기는 나의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기에는 정말 좋은 환경이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런 분위기에 답답함을 느껴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다.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교회 일에 충성하며 열심히 봉사하셨기 때문에 집안 일을 미쳐 다 하지 못하실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어머니 대신 내가 집안 일을 해야 했다.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나는 성장하면서 점점 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반항으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배우자도 불교 집안의 사람을 선택했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8남매의 외아들이었던 오빠가 젊은 나이에 소천하셨고 친정 집엔 어머니만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언니들의 권유로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고, 그래서 친정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기도와 봉사로 이겨내시며 더 열심히 헌신하고 계셨다. 그러나 나는 그런 어머니가 유별나게 생각되어 못 마땅하게 여겨졌다.
  몇 년 후에 우리 부부는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속에는 주일성수에 대한 부담감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주일에라도 교회를 나가기로 한 것이다.
 
내가 세상의 왕이 되어
 
  나는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아이들은 자라면서 아무런 말썽 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자라주었다. 우리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하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청소년 대표로 뛰게 되어 유명해졌고, 말 그대로 잘 나가는 선수가 되었다. 학교측에서는 학교의 명예를 높였다며 영웅시했고 어머니인 나까지도 같은 대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 무렵 남편의 사업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교회에서도 우리 가정을 행복한 가정, 잘된 가정의 모델로 삼을 정도였다.
  나는 교만해져서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살았다. 또한 내가 누리는 행복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내가 잘나서 잘난 아들과 남편을 두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다.
  나는 아들과 남편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거만하게 행동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자모회 모임이나 교회에서 구역모임이 있을 때, 과일 하나라도 최상품 박스로 내어놓는 등 스스로를 뽐내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나의 생활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이해와 구제도, 겸손함도 없었다.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즐겁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아들이 연세대학교로 스카웃이 되어서 주전으로 뛰게 되자, 나의 교만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2학년, 3학년 때도 다쳐서 계속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대표선수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3년이라는 그 긴 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회개할 유예의 시간을 주시고 기다리셨던 것이었는데 나의 영적 감각은 이미 무뎌져서 어리석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만을 깨뜨리심
 
  다행히 아들은 4학년 때는 다치지 않고 선수로 뛸 수 있었다. 지금에 와서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아지는 것은 아들을 통해 나의 교만을 깨뜨리시려 하셨지만 내가 깨닫지 못하니까 불쌍한 아들은 더 이상 상하지 않도록 놔두시고, 다음으로 물질을 통해 나를 깨뜨리시기로 작정하셨던 것 같다.
  남편이 하는 사업은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업에 손을 댔고 그 과정에서 무리하게 투자를 하는 바람에 자금 유통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막대한 빚을 짊어지고 부도가 나 버렸다.
  그 후 얼마 안 돼 집과 자동차는 압류되었고, 남편은 화장실에 가도 사람이 따라붙어 감시를 할 정도로 곤혹을 치르고 있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니 나는 나대로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넋을 놓고 있었고 남편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또다시 다치는 바람에 프로구단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축구를 포기하게 되었다.
  내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힘든 일 한번 안 해보고, 나만 잘 난 줄 알며, 돈 쓰는 일만 알았었는데 지금의 내 처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져 있었다.
  나는 새벽기도를 하기로 작정했다. 처음에는 내 처지를 한탄하며 울부짖었지만 한 주, 두 주, 시간이 갈수록 나의 죄가 깨달아지고 보이기 시작했다. 아들을 통해 축복 받은 것을 감사하지 못하고 교만했던 것, 남편을 통해 물질의 축복을 주셨지만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조차 안 하고 내가 모든 영광을 받았던 일, 교회를 다니면서도 봉사 한번 안하고 거드름만 피우며 교만했던 일 등 정말 어리석고 부끄러웠던 나의 모습들이 주님 앞에 다 드러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40일 새벽기도를 하면서 회개기도를 통해 새롭게 거듭났다. 그리고 기도를 하는 동안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겠구나! 뭐라도 해야 되겠다.’는 강한 의지와 담대함도 생겼다.
  40일 새벽기도의 작정기간이 끝나고 신문을 읽다가 충청도 아산에 전도사업 업체에서 간병인을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게 되었다. 마침 일자리라도 나면 한번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을 때라서 그 곳에 문의를 했는데, 그 일을 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그 곳으로 내려가 교육을 받고 취직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나는 아들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5~6인 실은 불결하다고 하며 항상 1인 실에 입원을 시켰고, 병원 밥을 먹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고 일하는 아줌마를 통해 집에서 밥을 해 나르는 등 유난을 떨었었다. 또 왠지 꺼림직해서 병원에서는 음료수 한 잔도 마시지 않았었다. 그러던 내가 간병을 하려고 결심을 한 것이다. 더구나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지방으로 가서 혼자 생활하는 것은 나를 아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드디어 그 곳에 가서 교육을 마치고 배정 받아 보내진 곳은 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주로 있는 곳으로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중환자들만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마침 내가 일을 시작 한 첫날부터 사람이 두 명이나 죽어 나에게 시체를 씻기고 수의를 입히는 임무가 주어졌다. 나는 너무도 겁이 나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교만했던 내가 가장 밑바닥으로 철저하게 끌려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 집 서랍에 당분간 쓸 돈을 넣어놨으니 자기가 어떻게 되더라도 어렵겠지만 견뎌나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예감이 이상해서 전화를 제발 끊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서울의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남편이 아무래도 세상을 등질사람 같다며 사정얘기를 하고 목사님께서 남편을 교회로 불러서 달래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행히 그것으로 남편 일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깨달은 것은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는 것이었다. 오직 그 상황에서는 주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일로 인해 남편을 위해 더욱 기도를 많이 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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