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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금식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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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 이윤의 권사(여, 52세, 동광교회, 강남구 대치동) -

 
‘저 아이가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나을 텐데’
 
  내가 열네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갑자기 발이 못을 박아놓은 것처럼 아파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놀란 어머니는 우리 집 단골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다. 그러나 굿을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2대 독자인 오빠 아래로 8년 만에 낳은 딸이라 우리 집에서는 내 병을 고치기 위해 이름도 고쳐보고 온갖 비방을 다 써 보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갈뿐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그 때,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시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나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저 아이가 예수님을 믿으면 병이 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대쪽같은 성격을 가진 우리 어머니가 무서워서 그 말을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은 하숙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집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딸의 병도 고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다음 주일에 나는 그 선생님과 함께 읍내에 있는 교회를 가게 되었다.
  교회에 가서 의자에 앉는 순간, 나는 하나님을 영접했고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날 목사님께서 내게 안수를 해주셨는데, 그 후에도 안수기도를 몇 번 더 받는 동안 내 병은 깨끗이 치료되었다. 병 고침을 받은 후, 면소재지에 새로 개척한 십 오리가 넘는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다녔던지, 어머니가 ‘네가 교회에 미쳤구나’ 하시며 핍박할 정도였다.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열일곱 살이 되어, 나는 정읍에 있는 한복선생님에게 한복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복을 배운지 3년 만에 나는 한복 의상실, 즉 한복 기술학원을 개원했다. 그 당시만 해도 여자는 결혼 전에 의례히 한복을 배우던 때였으므로 학원은 번창하였다.
  학원이 잘되니 바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도 나가지 않고 수입의 전부를 계 붓는 데 썼다.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무렵, 어느 날 계주가 도망을 가버렸고, 하루아침에 학원 문을 닫게 된 나는,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삶을 포기하다시피 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 나는 한복을 가르쳐주신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네가 그러다 정말 잘못 되겠다. 마음을 잡고 결혼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결혼 중매를 서 주셨다. 그러나 남편으로 만난 사람은 불신자였고, 결혼 후, 시댁 가풍에 따라 우상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나 결혼한 지 6년 만에 남편은 외도를 하였고, 다시 한번 믿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나는 ‘정말 사람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구나’ 하는 망연자실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 때, 어려움과 고통가운데서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었고,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다.
  내가 교회를 나가자 남편은 깜짝 놀라면서 교회를 못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당신도 나를 배신하는데 내가 누굴 믿고 살겠는가,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 당신이 이혼하자면 하겠다”며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렇게 ‘예수 믿는 죄’로 나는 시부모님을 더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고,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도 힘껏 했다.
  그러는 중에 차츰 마음에 안일함이 생기면서 나는 1부 예배만 얼른 드리고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놀러 다니기에 바빴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은 미지근한 신앙의 결과로 남편은 또다시 직장 동료였던 처녀와 관계를 맺었고 결국, 집을 나가버렸다. 처음에는 분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길 힘을 주셨고, 참고 기도를 하다보니 그 여자와 남편에 대한 미움이 불쌍한 마음으로 변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내 딸처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도한 지 3년 만에 그 여자는 남편과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끝내 남편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증오와 미움을 사라지게 하셨고 축복케 하셨다.
 
기도로 키운 아이들
 
  남편이 집을 나간 후 우리가족은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 나는 예배가 끝난 후에 항상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지면서 아이들을 영적으로 양육하려고 노력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매일 잠언 1절씩을 쪽지에 써서 도시락에 함께 넣어주었는데, ‘점심을 먹으면서 영의 양식도 함께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아이들은 ‘도시락과 함께 먹는 그 말씀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이들 교육과 생계를 위해서 나는 한복 만드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 맞아 주기 위해서 일부러 한복주문은 집에서 받았다. 일이 끝나고 나서는 자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맡에 앉아 딸과 아들의 장래를 위해 눈물을 뿌려가며 기도를 드렸다.
  우리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해 본적이 한번도 없다. 아이들 스스로 ‘과외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독서실과 집을 오가며 학교공부를 착실히 했을 뿐이다. 딸은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피아노를 했는데, 저가 어려운 형편을 아는지라 개인교습에 의지하기보다는 스스로 공부하고 연습하였다. 고등학교 다닐 적에는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을 하더니 결국 피아노과에 합격하였고, 대학에서도 만점 학점을 받아 대학 4년 동안 장학금으로 공부를 마쳤으며 대학원에서도 조교를 하면서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아들도 내가 진로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 대입준비를 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진로를 위해 백일 작정기도를 하더니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원래 자기가 가고 싶어한 곳은 교대였으나 교회에서 백일작정기도를 드릴 때 주님께서 ‘신학을 하라’는 응답을 주시면서 ‘그 길만이 네가 살길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아들은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진로를 결정한 후 조용히 내 두 손을 잡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어머니, 이제부터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아들에 대한 미련, 사랑을 모두 하나님께 맡겨 버리세요. 이 아들을 위해서 어머니가 해 주실 일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이 지금은 신학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두 아이 모두 아직 공부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오히려 내게 매달 용돈을 줄만큼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3일 감사금식’에 응답하신 하나님
 
  3년 전 한 장로님의 가정에 빚 보증을 해준 일이 있는데, 그 분이 형편이 풀리지 않아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하나님께 의뢰하기 위해 강남금식기도원에 올라갔다. 지난번에 올라와 5일 금식을 할 때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말씀과 함께 ‘장로님의 부인과 함께 와서 기도하라’는 응답을 주셨었다. 복을 받지 못하는 그 가정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그 집사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을 찾아가 함께 기도하자고 아무리 권유해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하여서 할 수 없이 혼자 올라가서 일주일 금식기도를 하던 중이었다.
  처음에 일주일 금식을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어서 ‘주님, 이 일을 어찌하시렵니까?’ 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3일 감사금식을 더 하라’는 응답을 주셔서 이어 ‘3일 감사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그랬더니 감사금식 이틀만에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응답을 주셨고, 그 다음날,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하던 그 집사님을 강남금식기도원에서 만나게 되었다. 자기도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기 위해서 올라왔다는 것이다. 언제나 기도에 응답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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