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간증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첨부 1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 최순애 집사(여, 45세, 영세교회, 노원구 하계동) -

 
시련의 세월
 
  어릴 때에는 교회학교에 다니며 성탄절성극에도 참여할 정도였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오게 되면서 어려운 생활에 교회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23살이 되었을 때, 이혼한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비록 이혼은 했지만, 새 가정을 이룬다면 열심히 살아갈 의지가 있어보였고, 나를 사랑하고 아껴줄 것 같아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사는 사람도, 따뜻한 사람도 아니었고, 늘 폭행을 일삼았다.
  견디다 못한 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3년 만에 헤어졌다. 빈손으로 나왔기에 직장을 전전하면서 시댁에 두고 온 아이가 보고 싶어 울음을 삼켜야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단했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절약하여 32세 때, 평소 소원하던 의상실을 개업했다. 나는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다. 손님도 많아서 그대로 간다면 얼마 안 되어 크게 번창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병이 들어 의상실을 자주 못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은 점점 어려워졌고, 임금을 지불할 형편이 안 되어 결국 폐업을 해야 했다.
  나는 괴로움으로 상심했으나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뒤, 다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다방을 시작하고 또 다시 몸이 아팠다. 꾀병이라고 할 만큼 겉은 멀쩡한데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어서 일주일에 사나흘은 다방에 나가지를 못했다. 다방운영도 다시 힘들어졌다.
 
스스로 교회를 찾을 수밖에 없어…
 
  인생의 어려운 고비마다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여러 차례의 전도를 거절하고 점을 보러 다녔다. 마음이 답답하니 그것도 중독이 되어 하루에 3번씩 다른 점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속 시원한 답과 치료는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내가 신기가 있어서 무당이 되는 내림굿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두렵고 겁이 나서 어떻게든 내림굿을 안받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때 내가 언니라고 부르는 이웃이 나에게 “예수님을 믿으면 무당이 되지 않아도 되고 병도 고칠 수 있다”라고 전도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내가 편안해지기전에는 교회에 안가겠다고 거절했다.
  그 뒤로 몸은 더욱 병들어갔다. 배를 만져보면 주먹만한 혹이 잡혔고, 불면증까지 걸려 쇠약할 대로 쇠약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좋아지기를 기대하며 버틸 힘이 없었다.
  그래서 내 발로 언니를 찾아가 교회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거의 20년 만인 1988년에 강남교회에 첫 발을 들여 놓았다. 그리고 병을 고치기 위해 강남금식기도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기도원을 다니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회개하였고, 세속에 찌든 모습이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토록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병을 치유 받았다. 영육이 치유함을 받은 것이다. 할렐루야!!!
 
행복은 나태함으로 연결되었지만…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는 가운데 배우자가 나타났다. 그는 나의 부끄럽고 아픈 과거를 모두 이해해 주었고, 아팠던 만큼 더 아껴주겠노라고 했다. 시부모님과 시누이 될 분들도 반대하지 않으셨지만, 다만 시어른들께서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고 결혼할 사람도 아직 믿음이 약한 것 같아 결혼 후에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할 것을 약속받았다.
  주님을 모르고 방황했던 과거의 고통스럽던 삶이 예수님 안에서 청산되었고, 결혼을 통해 보상해 주시는 것 같아 진정으로 행복했다. 우리는 결혼한 뒤에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데, 첫 아이까지 임신하고 너무나 행복했기에 신앙이 조금씩 나태해지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시련이 닥쳐왔다. 그렇게 소중한 우리의 아이가 유산된 것이다. 우리부부는 너무 실망하였지만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아이를 갖기를 소망했다. 아이를 달라고 기도도 하였지만 세월만 흘러갈 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은 아예 교회까지 멀리하였고, 자주 부부싸움을 하며 심한 폭력까지 휘둘렀다. 그 때문에 치아가 부러져나간 적도 있었다.
  고소하려고 맘먹을 정도로 부부사이가 벌어져 이혼을 하려고 서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랜 세월을 기다린 아이라 한편으로는 기뻤지만, 불화 끝에 이혼을 맘먹고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남편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전해주었더니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 어쩌면 그리도 돌변하는지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유산기가 있어 병원에 24일을 입원해 있었지만, 다시 신혼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았지만 배우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버릴 수 없어 대입검정고시를 치렀었는데, 남편이 직접 가서 합격증을 찾아다 주며 함께 기뻐했다.
 
아들을 통해 성숙하고 견고해짐
 
  우리부부는 심한 갈등과 시련을 겪은 뒤라 서로를 향해 이해하고 배려할줄 아는 사랑으로 한결 성숙해졌다. 나의 신앙도 더욱 자랐고, 남편도 신앙인으로 살려고 애쓰게 되었다.
  출산을 했는데, 아들이었다. 남편은 물론이려니와 그동안 아이가 없는 것에 대해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으셨던 시부모님도 너무나 기뻐하셨다. 아들의 이름은 태준이라고 지었다. 고난을 통과한 후, 다시 기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태준이가 태어날 때 태열기가 있어서 걱정했었는데, 병원에서는 커가면서 괜찮아 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낫지 않았고, 오히려 아토피성피부염이 생겼다. 양약은 일시적이라, 잘 고친다는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 먹였지만 부작용이 일어 더욱 심해졌다. 늘 가려워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렸다.
  남편이 게으름을 피우고 교회를 멀리하거나 세상의 것을 좇으면 아이의 피부염은 더 심해지곤 했다. 아이는 아빠가 식사기도를 안하거나, 소리를 내어 기도하지 않거나, 가정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어찌나 슬피 울고 떼를 쓰는지 집안에는 항상 예배를 드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아이의 피부염은 점점 더 심해져서 양약을 써야했고, 음식에 대한 반응이 너무 예민하여 아무거나 먹일 수도 없었다. 축농증, 중이염, 천식의 합병증까지 생겼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 옷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 차마볼 수 없었다.
  몇 년을 낫지 않는 아이를 보면 낙심이 되었지만,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작정새벽기도를 하며 오직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고 기도하였다.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아이를 위해 유기농산물로 식이요법을 해야 하니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지치고 괴로웠다. 나는 “하나님, 질병도 고쳐주시고 체질도 바꿔주세요!”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자꾸만 마음속에 강남금식기도원에 가서 금식하며 기도하라는 감동이 강하게 왔다.
  나는 상담을 통해 아이와 함께 3일씩 금식을 하라고 하여 순종했다. 생수만 먹으며 3일 금식을 하는데 아이가 물만 먹어도 토하는 것이었다. 너무 약해있던 어린 아들은 대답도 못할 정도로 기진해졌고, 너무 측은한 마음에 간절히 기도하면 나의 입에서는 감사의 찬양만이 흘러나왔다.
  금식을 마치고 보호식을 하는데 아이에게서 음식에 대한 예민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탕이나 음료는 입에 대지도 못했었는데 괜찮아졌다. 옷을 벗겨보니 딱지가 군데군데 앉았을 뿐 만5년 동안을 심하게 앓아 다 썩은 피부가 매끄럽고 깨끗하게 고쳐져 있었다. 할렐루야!!!
  아들을 고쳐주시고, 또 아들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린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