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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딸이 미처 다하지 못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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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미처 다하지 못한 일
   
- 박노의 권사 (여, 78, 안양문화교회, 경기 군포시 ) -


공부를 하기 위해 감행한 가출
 
  나는 아직도 정정하고 또 젊어 보여서 이제 60세가 조금 넘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건강도 아주 좋아 실제로 젊은 사람 못지않게 왕성하게 전도 활동도 하며 기도회 동아리를 이끌며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청도 산골이다. 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집안은 서울(한양)로 과거를 보러 다니던 선비 집안이었다. 때문에 살림은 다른 집보다 어려웠지만 아버지께서는 항상 바르고 올곧게 살라고 가르치셨다. 내가 일곱 살 때, 그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고, 산간지방으로 워낙 시골이라 그 정도가 더 심했던 것 같다.
  어머니와 큰 오빠가 근근이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바르고 정직하게 정말 열심히 사셨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나는 학교에는 못 다녔고 대신에 천자문을 배웠다. 사촌이 학교에 갔다 와서 호롱불을 밝혀놓고 공부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는 천자문을 다 익혔고, 한글도 오빠에게 배워서 읽고 쓸 줄은 알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의 정말 작은 우리 동네에 중년부인 한 분이 찾아오셨다. 그 분은 동네의 아이들에게 자기를 따라 인천으로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보호자의 도장을 찍어야만 데려간다는 조건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14살이었다.
  내가 아무리 졸라도 집에서는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나는 그 부인을 꼭 따라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부인에게 하루만 더 머물면 도장을 찍어오겠다고 사정하였다. 그리고 밤중에 몰래 도장을 가져다가 찍었다.
  다음 날 어머니와 오빠가 들에서 일하실 때, 부인을 재촉하여 몰래 가고 있는데 어머니가 나를 부르며 쫓아오셨다. 내가 붙들려서 못 가게 되니, 다른 아이들도 내가 가지 않으면 모두 안가겠다고 해서 인천으로 가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열흘 후에 그 부인이 다시 오셨고, 나는 기어코 그 부인을 따라나서기 위해, 결국 가출을 감행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인천의 한 방직공장이었다. 그 곳은 1500명이 2교대로 나뉘어, 하루에 12시간씩 근무하는 곳이었다.
  나는 힘들게 일만 시키고 공부를 시켜주지 않아 기숙사 선생님께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공부를 하기 위해서인데, 왜 공부를 안 시켜주세요?” 하고 막 따졌다. 그러자 며칠 후에 우리를 모아 놓고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그러나 12시간을 일하고 나면 지치고 피곤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는 비록 일본어로 하는 공부였지만, 어찌나 기쁘고 즐거운지 밤새도록 일을 하고 와서도 졸지도 않고 공부를 해서 늘 전체에서 1등을 하였다.
  그곳에서 19살까지 있다가 집으로 내려왔는데, 부모님께서 내가 어렸을 때 정혼해 놓은, 당시 을지로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의사와 결혼을 시키셨다.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21살에 첫 아들과 딸을 2살 터울로 낳고 남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1950년, 내가 26살 때 6.25가 일어났다. 전쟁 중에 남편은 납북되고 그 뒤로는 행방을 모른 채 나 혼자서 아이 둘을 키워야 했다.
  딸이 진명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6년 동안을 1등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한 것은 종교를 기독교로 선택하고 수련회 등을 다니며 은혜를 받았다. 딸의 믿음이 어찌나 좋던지 나와 아들, 그리고 집안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딸이 종교부를 선택하게 된 동기는 아버지 없이 큰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기에 자기도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고, 대학도 그동안 꿈을 키워온 사회에 대한 봉사의 길을 가기위해 이화여대 사학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 길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딸이 대학교 2학년 때 내가 들고 있었던 계가 깨지면서,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그 바람에 딸은 학교를 중퇴하게 되었고, 그 충격과 고민으로 정신분열증에 걸렸다.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했지만 완치되지 않았고, 그토록 똑똑했던 딸이 그렇게 되자 나의 마음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병원에서조차 정상인과 같이 되는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내 목숨을 내어 놓다시피 하고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더욱 매달렸다. 밤마다 딸이 다녔던 학교들을 찾아다니며 “하나님! 제 딸이 이 학교에 들어와서 주님을 믿게 되었고, 선한 뜻과 목표를 가지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왔는데, 병원에서도, 다른 사람들도 제 정신 찾기를 포기하라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합니다. 내 딸을 고쳐주셔서 하나님 일에 써주세요.” 하고 철야기도를 했다. 그렇게 기도한 지 4년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딸은 완치되었다.
  딸은 그 후에 보육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선교원장으로 선교원 5개를 개척하였다. 하나님께서 모두 부흥하도록 역사해 주셨다.
 
조금 먼저 데리고 간 것뿐…
 
  딸은 목사님을 만나 결혼을 한 뒤, 우리나라 최전방인 임진강가에서 전도하고 훈련을 받은 후, 볼리비아 선교사로 떠났다. 그 곳은 후진국이었고, 여러 정황이 좋지 않아 가지 못하게 붙잡았으나, 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며 떠났다. 그리고 자신을 살려주신 주님이 보내시는 곳이니 기쁘다고 하였다.
  그 곳에서 남편과 함께 원주민 교회와 학교를 짓고 사역을 하였는데, 너무 무리한 탓인지 병이 들어 47세에 천국으로 갔다. 나는 딸이 세상을 떠난 후, 매일같이 울며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내 생명을 가져가시든지, 아니면 과거를 잊어버리는 약을 주세요. 사랑하는 내 딸을 먼저 보내고 더 이상은 살 수 없습니다.”라고 울부짖는 나에게 어떤 분이 과거를 잊는 약이 있다고 따라오라고 했다.
  내가 간 곳은 경상도의 어느 시골이었는데, 첩첩산중인 그곳에 작은 굴이 하나있었다. 그 안에서 어떤 여자 분이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딸을 보내고 나 혼자 살아봤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과부의 신원자가 되시며 고아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나에게는 억울한 일만 당하게 하십니까? 아무리 잊으려 해도 사랑하는 내 딸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이대로 기도하다 죽으렵니다.” 하면서 3일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태어나서 옳고 바른 일만 하다가 가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 네 딸은 조금 먼저 데리고 간 것뿐이니 너무 원통해 하지마라! 네 딸이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은 네가 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의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슬프던 울음이 그치고 다시금 새로운 소망이 살아났다. “그래. 우리는 다시 만날 영원한 그 곳, 천국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자 슬픔이 변하여 감사가 넘쳤다. 할렐루야!
  나는 오래전부터 최자실 목사님께 은혜를 받았다. 그래서 그분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나라의 믿음의 종으로 여기며 하나님께 감사했었다. 지금 그분은 계시지 않지만 살아 계실 때의 은혜를 못 잊어 아직도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아가 기도를 한다. 나는 장차 주님과 주님 곁에 먼저 가있는 딸을 다시 만날 그날을 고대하며 이 땅에서 내게 맡겨진 기도의 사명과 전도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강남금식기도원에 맡겨진 큰 사명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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