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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말씀 앞에 깨어진 나의 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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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앞에 깨어진 나의 교만 
   
- 엄재신 선교사(여, 30세, 부천순복음교회, 경기도 부천시) -


어머니의 서원기도

  내가 태어나기 전 우리 할머니는 동네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이셨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당연히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내가 8살 때 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이런 신앙 없는 가정에 시집을 오게 된 어머니는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를 가지셨을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하혈을 심하게 하셨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섬기던 교회의 목사님을 모셔서 기도를 받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아기를 무사히 태어나게 해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키우겠다고 서원기도를 하셨다. 그래서 나는 건강하게 태어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나는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다르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내가 5살 때의 일이다. 어머니는 항상 새벽기도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는데, 하루는 잠자는 나를 혼자 두고 새벽기도를 가신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느 때처럼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데 5살짜리가 캄캄한 새벽 길을 혼자 걸어서 교회를 찾아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어릴 때부터 새벽예배를 드리며 중·고등학교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성장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내가 서원기도로 하나님께 바쳐진 종임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

독신 선교사로 헌신

  내가 18살이 되던 해에, 고등부 수련회가 있었는데, 그 수련회를 통해 큰 은혜를 받은 나는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 신학을 해야 된다. 선교사가 되야 한다.’라는 소원을 가지고 독신으로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수련회에서 돌아와 어머니께 그 말씀을 드리자 그때서야 어머니는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드렸던 서원기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나는 어머니께 왜 이제서 그 이야기를 해 주시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가 하나님께 직접 소명을 받고 스스로 원할 때 말해 주려고 하셨다고 설명을 해주셨다. 어머니는 지혜롭게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셨던 것이다.

선교회 활동

  24살이 되었을 때, 나는 신학을 시작했다. 신학을 시작하고 얼마 후, 어떤 힘에 이끌려 강남금식기도원을 찾게 되었다. 나는 기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내려놓고 기도굴로 향했다. 3일 내내 예배만 끝나면 기도굴로 달려가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다.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는데 “너에게 누가 찾아 올 것이다.”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학교 선배가 찾아와 선교회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는데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하였다. 나는 하나님의 응답이라 생각하고 지체하지 않고 승낙을 하였다. 선배를 따라 간 곳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연예인선교회였고, 그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찬양으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평소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TV에서나 볼 수 있는 연예인들과 함께 사역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즐거웠고, 또한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터에 가끔 학비도 받고 용돈도 받을 수 있어 감사했다.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에게 큰 은혜와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해 몸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선교 활동을 했다.

서서히 시작된 교만의 싹

  하루하루가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고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년쯤 선교 활동을 하던 나는 점점 감사를 잃고 교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바쁘게 활동을 하다보니 일이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열심을 잃어가게 되었다.
  어느 날 당회장 목사님께서 기도를 해주시려고 직접 나를 찾아 오셨다. 아무나 가까이 하기 어려운 분을 만나고, 쟁쟁한 연예인들과 함께 어울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선교 활동을 하다보니 나의 교만은 서서히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기 시작했고 ‘뭐 저 정도밖에 안되냐. 왜 저렇게 사냐.’ 하며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학교 3학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으셨던지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다. 나처럼 나이 어린 사람이 함께 일했던 사례가 없었고, 형편상 남루한 차림으로 다녔기에 나는 항상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활동을 했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한마디의 말 실수로 인해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쫓겨나다시피 나오게 되었다.
  그렇게 연예인선교회를 나와서도 나는 쉬지 않고 여러 선교회에 소속되어 전국을 다니며 활동을 하였다. 바쁘게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하면서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었다.

교만으로 눈이 멀어…

  대학원 1학년 때 나는 청교도를 강의하시던 교수님의 배경에 매료되어 바늘과 실처럼 그분을 따라다녔다. 지구를 16바퀴나 돌며 여행을 하셨다는 것과 외국생활을 많이 하셨다는 그분의 이야기는 선교사를 꿈꾸며 기도하던 나를 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쫓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눈에 보이는 세상의 지식을 좇아가고 있었다.
  그 무렵 아프지 않던 허리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허리가 틀어져서 1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던 일이 있었다. 신학교에 원서를 내고 등록을 하고 나서야 틀어진 허리가 정상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는 한번도 아프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엔 허리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목에 염증이 심해 고열에 시달리고, 편도가 부어 올라 말을 하기도 힘들고 침을 삼키기도 힘이 들었다. 염증은 온 몸에서 나타났고, 대변에서는 피가 섞여서 나왔다. 그렇게 2년 동안을 고통스럽게 보내면서도 기도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편에 계속 …)


계속되는 시험에 지쳐서

  그러던 어느 날 신학교 때 함께 공부하던 한 형제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그런데 세 번 정도 만났을 때, 우연히 그가 유부남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배신감이 들면서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너무 미웠다. 그러나 그는 유부남인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를 맴돌며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나는 속상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2주 동안 집안에서 혼자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몸은 몸대로 아프고 가슴은 너무나 답답해 죽고 싶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강남금식기도원을 기억하게 되었고, 결국 짐을 싸서 강남금식기도원을 다시 찾아갔다.

강남금식기도원에서

  기도원에 도착해서 10일 금식을 작정하고는, 짐을 내려놓고 바로 기도굴로 갔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추위에 덜덜 떨면서 기도를 드렸다. 하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기도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소리치고 울며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으셨다.
  정말이지 내 모습이 너무나 처량하고 한심했다. 나는 하나님께 차라리 죽여달라는 기도를 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이렇게 살게 하시려거든 차라리 죽여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렇게 3일 동안을 몸부림치고 울면서 기도했지만 몸은 여전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답답한 가슴은 뚫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4일 째 되는 날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밑으로 무언가가 뭉클뭉클 흘러 나왔다. 예배를 마치고 화장실에 갔더니 허옇게 무언가가 쏟아지면서 몸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5일 째 되는 날이었다. 예배시간에 머리가 아프면서 통증과 함께 심장이 멎을 것같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예배 중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도저히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그것이 귀신의 장난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죄와의 싸움

  기도원 상담실을 찾아가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엄연히 나도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인데 하는 얄팍한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온 몸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존심을 버리고 기도원 상담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여 기도를 받았다.
  기도를 받고 나니 통증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저녁만 되면 통증이 다시 심해졌다. 통증은 온몸을 돌아다니며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때 머리 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위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무당이셨던 할머니, 그리고 자살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아! 지금 내가 나의 죄뿐만 아니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죄와 영적 싸움을 하고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오기가 생기면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기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계속해서 ‘예수의 피밖에 없네’를 반복하며 나와 조상들의 묶은 죄에게 보혈을 선포했다.

예수님의 보혈로 승리

  다음날도 성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양옆에 앉아 있던 성도 두 명이 나를 향하여 마주 앉더니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몸도 아프고 귀찮고 해서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미소를 지어주며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내가 만든 사람을 비판하는데 너는 미소로 동조하느냐”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즉시 회개를 하고 그들과 말하지 않고,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 다음날 새벽 1시쯤이었다. 성전에서 조용히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다. 하얀 광채로 둘러싸인 예수님이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등에 십자가를 지고 계셨다. 등에서부터 다리까지 채찍에 맞아 살점이 여기 저기 뜯겨져 피를 흘리고 계셨다. 고통 중에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이 당신의 길을 가고 계셨다. 그 생생한 장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며 통곡하고 말았다. 그때 나는 귀신이 쫓겨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교만이 깨어지고…

  그러나 금식 9일 째가 되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아팠다. 나는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 것도 점점 귀찮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날 하나님께서는 저녁예배 설교 중에 차돌같이 단단한 나의 교만한 마음을 보게 하셨다. 그 동안 나는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잘나서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그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기 때문이다. 너는 그 일을 하는 데에 사용된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네가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많은 다른 사람들을 세울 수 있다.”라고 하셨다.
  돌보다 더, 아니 다이아몬드보다 더 강하고 단단했던 나의 교만한 마음은 그 말씀 앞에 철저히 부서지고 말았다. 한참동안을 망치로 얻어맞은 것같이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 안에 있는 우상들을 하나하나 성경책 뒤에 적기 시작했다. 지식의 우상, 외모의 우상, 교만의 우상, 그리고 조상들의 죄까지 생각나는 대로 빠짐없이 적고는 그 모든 죄들을 시인하며 간절하게 회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작정한 10일 금식의 마지막날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거짓말처럼 온몸의 통증이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하나님께서 나의 회개 기도를 들어주시고 깨끗하게 치료하여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로 나는 아무 것도 내 뜻대로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노라고 고백하고 다짐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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