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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기적의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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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아

- 최순희 집사 (여, 47세, 축청교회, 전남 완도군) -



설움 많던 내 어린시절

  내가 처음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은 것은 2년 전이었다. 자동차에 생선을 싣고 다니면서 장사를 하였는데 그날따라 생선이 도무지 팔리지 않아서 ‘어떻게 할까?’하며 고민을 하던 중 이전에 한 번 우연히 들렀던 강남금식기도원이 떠올랐다.
  10년 동안 다니던 기도원을 뒤로하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아가 말씀과 찬양으로 큰 위로와 새 힘을 받아 하산하였다.
  효령대군 18대손인 나는 전남 완도에서 태어났다. 할머니 때부터 불교를 믿기 시작해서 어머니가 시집 온 지 3년이 다 되어도 아기가 생기지 않자 할머니가 장 항아리에 불공을 드려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불공을 드려 어렵게 태어나서 그런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라났으나 그것도 잠시, 일곱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면서부터 나의 파란만장한 일생이 시작되었다.
  부모님은 사이가 안 좋아서 훗날 각기 재가하셨고,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에서 자라면서 초등학교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연로하셔서 돌아가시자 당시 군악대 주임 상사였던 아버지가 오셔서 나를 양재학원으로 보낸다는 명목으로 할아버지가 내 앞으로 물려준 논밭을 팔아서 새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새어머니의 집으로 데려간 지 한 달도 채 안된 정월 초하루 그 추운 엄동설한 이른 새벽에 나는 아버지에게서 쫓겨났다.
  슬픔과 설움 속에서 첫차를 타고 어렴풋한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찾아갔으나 “왜 왔니?”라는 어머니의 차가운 음성과 함께 문전박대(門前薄待)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나의 가슴 속에는 그때의 아픔과 설움이 서려 있어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너무 서러워 입술을 깨물고 내 성을 ‘이’에서 ‘최’씨로 바꾸어 ‘최순희’라는 이름으로 의붓아버지 밑에 호적을 넣고 눈칫밥을 먹으면서 그 집에서 더부살이 생활을 하였다.
  그것도 순탄치 않아서 서울에 올라와 여기저기 직장생활을 하다가 21살 때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상태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가면서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절에 다니면서 불공을 열심히 드렸다.

주일학교에 나가던 딸을 따라서 나가게 된 교회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11살 되던 해 크리스마스 때부터 교회에 몇 달 다닌 기억이 있었는데, 불공을 드리러 쌀을 머리에 이고 산을 넘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는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찬송가 502장)가 정확하게 1절에서 3절까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교회에서 배운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찬송인지도 모르고 불공을 드리러 갈 때마다 열심히 혼자서 흥얼거리며 불렀다.
  이제 내가 예수를 영접한 지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주일학교에 나가던 딸들을 따라서 우연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 교회에 처음 예배에 참석한 날,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놀라움과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 후 하나님은 너무나 많은 은혜를 주셨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해 주셨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게 되었다.
  믿지 않던 남편도 사업이 부도를 맞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지금도 금식기도를 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다.

신앙생활의 위기와 갈등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정에 큰 위기가 닥쳐왔다. 남편이 사소한 일로 교회 목사님과 자주 문제가 생기자 시험이 들어 신앙에 큰 갈등을 겪던 중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했는데 “그곳을 떠나라”는 응답을 받고 돌아왔다.
  나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동안 드리지 못한 모든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며 눈물로 기도하던 중, 환상을 보게 되었는데 흰옷을 입은 분이 나타나서 “모든 가족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이 응답임을 믿고 아멘 하고 순종했으면 좋았을 텐데, “목사님이 개척하신 교회지만 하나님의 교회니까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에 계속 출석하였다.
  어느 정도 시일이 흘러 남편과 목사님이 화해하고 온 가족이 다 교회 일원이 되어 열심히 충성 봉사했지만 남편이 하는 일마다 안되고 마침내 온 가족이 장막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고난이 닥쳐왔다.
  그때부터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동차에다 생선 및 건어물을 싣고 전국을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여의치 못하여 고향인 완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축청리교회 목사님은 우리 부부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사람들이 버리고 간 빈집을 하나 골라 보일러를 놓아주셨다. 그래서 여기저기 흩어졌던 온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 교회에서 뜻하지 않게 찬송을 인도하며 때로는 말씀 선포까지 하면서 목사님을 돕고 있다. 이제 나의 새로운 꿈은 완도군, 완도읍을 구역 삼아 그들을 전도하며 교회 부흥에 앞장 서는 것이다.

기적의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성령 받아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그곳에서 이전에 하던 건축업을 다시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셨고, IMF에도 그치지 않고 일거리가 들어오게 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과 찬양이 넘치는 기적의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성령을 받아 나처럼 전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뜨거운 성도들이 되었으면 한다.
  나의 마지막 바람은 전남 완도군에서 토속신앙을 몰아내고 복음화 시키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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