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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죽으면 죽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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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죽으리이다
   
- 박종식(남, 38세, 연변대학교 농학원, 중국 길림성 용정시 하남가) -


수의학과를 졸업하고 동물병원을 운영하다가

  충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교회에서 학생부 회장을 맡아 열심히 교회 일을 하면서도 83년도에 서울대 수의학과를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때 목사님이 “신학을 공부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으나 크게 내키지 않았고, 몸이 약해지면서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갔었다.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릴 때 많은 은혜를 받고는 ‘정말 신학을 할 것인가?’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성전 밖에서 우연히 최자실 목사님과 마주쳤다. 별로 기억할만한 일이 없었는데도 나를 보자마자 ‘다른 생각 하지말고 지금 전공을 살려야 한다. 그걸 통해 돈을 벌어서 하나님께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18년 전 우리나라에는 수의사가 별로 없었을 때라 이걸 공부해 무슨 돈을 벌겠나 하면서도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러나 대학시절 운동권에 가담하여 교회와는 멀리 방황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 다시 신앙이 자리잡히면서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믿음이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나는 동물병원을 개업했는데 참 잘 되어서 주위사람들이 “모두 당신은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기뻐해 주었다. 신앙이 돈독해지면서 교회에 가서 대걸레를 가지고 바닥을 닦으며 주일성수 했고, 매주 월요일에 버는 돈은 모두 헌금하였다. 돈을 세어보면 시험들까 봐 세지도 않았는데 집사람이 가끔 8, 90만원이 넘는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동기들은 여러 의료기를 들여놓고 했지만 나는 기껏 청진기와 주사기만으로 일을 하였다. 그런데 기도하면서 운영하여서인지 희한하게도 병이 잘 나았다. 주위에서 꽤 소문이 나서, 외국 사람들도 간혹 다녀가곤 했다.

1억 3000천만 원을 떼이고, 중국으로 건너가

  병원을 개업하고 나서 4년 정도 지나고 나니 물질이 웬만큼 모여졌다. 그래서 전세를 넓히려고 계획하였다. 그러자 우리를 도와주던 사람이 갑자기 돈을 꾸어 달라고 했다. 그 사람은 2년 전부터 돈을 가져가서 이자를 꼬박꼬박 주고 있었다. 전에 빌려준 돈에다 다시 빌려준 돈을 합치면 1억이 3000천만 원이 넘었다. 돈을 빌려주고 난 뒤 얼마 후 그 사람이 이상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 가정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돈을 빌려 주었는데 모두들 못 받을 상황이 되었다며 옥신각신하였다. 처음에는 ‘설마 그 좋은 사람들이’ 하며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중고등학교도 어렵게 다닌 것은 물론 대학도 장학금 주니까 수의학을 공부하였고 사업장이 협소하다고 받은 비웃음도 극복하며 잠 잘 것 못 자고 번 돈이었는데 배신감과 분노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들은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접근하여 돈을 빼내서는 돈을 물쓰듯하며 특히 기관의 책임자에게 잘하니까 각종 리더자리를 맡으며 입지를 견고히 하여 금융사고를 저지른 것이었다. 그들과 가까워진 동기가 된 집사람에 대한 야속함과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가 하는 원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얼마나 괴로웠던지 욥의 고백처럼 ‘밤이면 언제 새벽이 올꼬’ 하고 고뇌하면서 이것이 꿈이면 빨리 깨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괴로웠다.
  나는 외골수 성격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인지 절망감으로 아무 용기와 의욕이 없어서 주사기를 잡으면 떨어뜨릴 정도였다. 병원은 헐값에 넘기고 집사람은 아이들과 처가로 내려가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떠돌며 지냈다. 이렇게 된 바에 ‘중국이나 들어가자’고 결심하였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놓지 못하는 것이 자존심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사기 당하는 조선족을 위해 일하겠다.”고 그럴듯하게 말하고는 중국으로 갔는데 거기서 많은 고생과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거울속 내 모습은 생기하나 없는 목각 인형 같았다. 음식을 먹거나 걸어 다녀도 아무 느낌이 없이 너무나 힘들었다. 오로지 그때는 한국에 가면 ‘그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중국에서 자비량 선교사(tent-maker)였다. 의무감으로 연변대학 겸직교수와 한중장학회 사무국장, 농장책임자의 직분을 맡아 실속은 없지만 억지로 일을 했다. 그러다 한국으로 들어오면 그들을 죽일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있다 너무 곤고하니까 전에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라는 것을 얼핏 들어 봤는데 한번 가서 해보자 하는 생각이 나서 99년 청평 강남 금식기도원에 갔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IMF로 실업자가 많은 가운데 나 역시 잠바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기도원에 있으니 누가 와서 밥 먹자고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밥을 먹으면서 기도하다 이틀동안 혼자 금식하며 기도도 해보았지만 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르며 계속 분노와 적개심으로 참을 수가 없었다. ‘내일 그 사람을 찾아가 끝장을 내자, 기독교인이라고 못할 게 뭐냐’하며 모진 결심을 하였다.

  다음날 나는 무조건 상담실을 찾아가서 전도사님께 나의 계획을 말씀드렸다. 나의 하소연을 한참 들으시던 전도사님이 함께 기도하자고 하셨다. 함께 기도하는 순간 2, 3년 간 억눌렸던 눈물이 왈칵 솟아지면서 갑자기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신음소리가 나왔다. 나는 창피하여 스스로를 절제했다. 상담실을 나오며 ‘그래, 그 놈을 죽이는 것은 나중에 하고, 한번 기도 해 보는 거야’하며 성전 앞에 걸린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붙잡고 “주여!” 하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르짖을 때마다 내 몸 속에서 뭔가 하나씩 더러운 것들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인간에 대한 분노, 미움, 원망, 혈기...그러면서 속이 풀리곤 하면서 어느새 분노가 사라져 버렸다. 기도원에 있는 동안 상담 전도사님과 목사님들의 많은 기도와 사랑으로 나는 내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에 살이 붙듯 그런 느낌이 쫘악 올라왔다. ‘아! 이게 은혜구나, 왜 이걸 몰랐을까’하는 감사의 눈물 속에 방황한 세월들이 후회되었다. 그러다 일 때문에 중국에 들어가면서 성경을 보기 시작했다.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은혜가 되고 그곳 선교사님들과도 교제가 되었다. 기회만 되면 한국에 나와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질 때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깨달아

  수시로 금식기도 할 때마다 마음의 상처가 씻기고 찢어진 관계들이 회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질 때 비로소 일들이 잘 풀려져 감을 체험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처가에 있는 동안 아내는 혼자 사업을 하다가 일부 돈을 잃게 되었다. 나는 아내에게 ‘인생 수업료 낸 셈치고 감사하라.’는 말을 했다. 예전 같으면 하지 말라는 일 벌리고 다닌다고 책망하면서, 믿음도 없는 아내에게 당신이 기도만 하면 우리 일이 빨리 풀릴 것이라고 하며 힘들게 했을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보다 우리가 이혼 안하고 당신이 잘 참아준 것이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하며 아내를 위로하고 있다. 이번에 30일 금식을 하며 보호식 중에 있는데 아내가 주님 앞으로 나올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눈과 귀가 새로운 세상,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도록 바뀌었다고 감히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비관적인 삶의 태도가 바뀌어 이제는 공중의 새를 보고도 여유 있게 웃을 수 있고, 아침에 태양을 봐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비추어 주신다는 감사가 나올 수 있는 성품으로 변화되었다. 말씀을 묵상만 해도 하늘에서 기쁨을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늘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는 느낌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중국에 3개월 더 들어갔다 와서는 가정을 돌볼 계획이다. 또 돈도 열심히 벌어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목회자가 없는 농어촌에서 2∼3년 봉사하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하는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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