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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 나의 구원 ] - 사망에서 생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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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가끔 원치 않는 불운을 당할 때 세상을 비관하거나 포기한다.
푸쉬퀸은 생활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두려워 말라고 했다.



1. 고난은 축복의 전주곡

나에게도 고교 졸업후(21세) 너무나 아픈 병이 들었고, 결국 불치병으로 치유할 수 없는 병고에 시달리면서 합병증으로 젊음을 포기할 무렵, 전도를 받고 고향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갖은 약과 거액의 굿을 해도 낫지 못할 바이러스병(3차 신경 침투,세포마름, 마비, 10년 전후 내 사망)에 시달릴 때 주님의 부름이 있었다. 만약 내가 고교 졸업후 병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 사회인으로 타락해서 병자로 버림받아 죽었을 지 모른다. 워낙에 악기를 좋아하고 그래서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추상하건데 세속에 푹 빠져 버려졌을 가능성이 많았다.



2. 주를 영접한 날

나는 1974.10.16 수요일 밤 예배가 첫 예배가 되었다. 물론 어릴 때 교회를 나간 기억은 있으나 성인이 되어서 교회를 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 첫 설교가 이 세상은 마귀가 주는 지식으로 살기에 거짓되고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메시지였는데 나에겐 빛이요 길이되는 뜻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이해의 눈이 열리면서 그 시간 이후 한번도 그리스도를 떠난 적이 없으며 주일 예배를 빠진 적이 없다. 불신 가정이요 불교 집안이라 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주일 성수 잘 하기 위해 열심을 다해 노력했다.



3. 불치의 병이 낫다

장로회 고신측 제단이었으므로 병낫기 위한 기도보다 성경 열심히 읽을 것을 권유하였으므로 열심을 다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눈이 따갑고 목이 타도록 간절했다. 즐겁게 찬송하니 동네분들이 미친 자라 했으며 결국 모친께서는 점장이를 불러 굿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예수의 은혜는 그칠 줄 모르고 날마다 감격 속에 찬송하며 열심을 다하니 약 2년여 만에 병이 낫게 되었다. 놀라우신 주의 은혜였다.



4. 26세 부모형제와 고향을 떠나다

그때 돈 3만원을 얻었다. 그것으로 일생을 시작하기 위해 마산 무학산 기도원에서 3일 금식을 하고 결정은 부흥회때 뵈었던 귀한 목사님이 계신 대구를 출발하게 되었다.
대구는 너무 더웠고... 얼마되지 않은 남은 돈으로 1만원짜리 달세방을 얻으러 사흘 길을 다녔다. 밤에는 구하라 하셨으니 기도했으며 낮에는 찾으라 하셨으니 찾아다녔고, 문을 두드리라 하셨으니 대문마다 두드렸지만 좀처럼 1만원 짜리 달세방은 없었다.
사흘이 되었을 때는 이미 기직맥진하였고, 성경이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과연 이런식으로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그 길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너무나 지쳐 크다란 어느집 대문 앞에 덥석 앉는다는게 대문을 머리고 쿵~ 부디치고 말았다. 그리고 누운 채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나오시니.. 왈 누구요!~ 하신다. 아 예, 전 1만원 짜리 달세방 얻으러 다니는 중입니다...
당시 나는 치유의 은혜는 입어 정상적인 걸음을 걸었으나 후유증으로 아주 약한 몸이었다. 그 아주머니 자식같이 여기시고 1만원으로 그 큰 빈 집(새로 지은 집)을 맡기신다.
그 아주머니 주의 은총 많이 많이 받으시길 아직도 빌고 있다.



5. 긴긴 겨울 밤을 창고에서 보내다

어느듯 추운 겨울이 오자 갈 곳이 없어 어느 2층 집 계단 아래 조금한 창고에서 대구의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참으로 추웠다. 너무 추우니 눈물이 절로 났다. 밤이면 온 몸이 추워 견딜 수 없이 떨었다. 지난 여름에 어느 목사님이 사 주셨던 여름 홑이불을 깔고 덮었으나 온기가 없었다. 밤을 괴로워 하다 그저 새벽기도 시간 문이 열리면 따슨 난방이 있었기에 참 좋았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전도사 고시를 준비하여 합격했고, 곧장 그 추운 창고 생활을 벗어나 영천 금호중앙교회라는 곳에 전도사로 첫 부임을 할 수 있었다.



6. 목사가 된 후...

나는 아내를 만난 후 줄 곧 아이(남) 둘을 키우면서 이들을 키워 주의 나라를 위해 쓰임받아야 한다고 소원했다. 아이들은 무럭 무럭 잘 자라줘서 참으로 감사한다.
큰 아이와 둘째 아이를 작명할 때 주께 서원하기를, 큰 아이는 잘 가르치는 목사요 교수가 되기를 바라면서 진실(眞實)라 하였고, 작은 아이는 거룩한 교회를 위해 은혜스런 목회자로 성공하라고 거룩한 백성(이스라엘)이라는 뜻으로 성민(聖民)이라 명했다.
2002년 현재 두 아들은 부산, 고신대학 4, 3 학년에 재학중이다(2003). 두 아이가 신학교를 입학하면서 둘 다 신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것이 얼마나 주의 영광이 되었는지 모른다. 맘으로 얼마나 감격하고 울었는지 모른다.



7. 늘새롬교회는 주님의 뜻대로

나의 아내는 대구에서 교육받고 자랐다. 저는 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아직도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다. 건전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주는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나는 이 불신의 시대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난 것만도 크다란 감격이라 본다. 주님이 내게 주신 말씀의 은혜와 특별히 성경의 은혜를 나누면서 승리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개혁주의적 교회로 성공하기를 원한다. 인본주의의 속화를 배척하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승리하고 성공하는 성도들로 키우고 싶다.
늘새롬교회는 모든 언행심사를 주예수 안에서 시도하는 교회로 그 중심을 가지며 반드시 이 시대가 요청하는 구원의 교회, 개혁의 교회, 승리의 교회이길 기도한다.

할렐루야! 부족한 사람의 간증을 끝까지 읽어주심에 감사하며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늘새롬교회 강종수 목사.
늘새롬교회 카페 http://cafe.daum.net/nulserom
늘새롬의 홈페이지 http://nulserom.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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