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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인도네시아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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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 김화수 인도네시아 선교사  (40세, 여, GP 선교회 (Global Partners) ) -


새벽마다 찾아와 깨우시는 하나님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나는 평범하게 학교를 졸업하여 회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은 나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두드리시기 시작하셨다.

  그 무렵 나는 ‘한 번밖에 살지 않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문자답(自問自答)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끊임없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이루어 보고 싶은 세상적인 욕망과 신앙 사이에서 심적인 방황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찾아 오셔서 단잠에서 일깨우시고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계 3 : 15)"라는 말씀을 주시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느끼게 하여 주셨다.

  나의 “하나님, 조금만 참아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시작된 기도는 하루, 이틀, 한 달, 눈물 속에서 계속 지속되었고 지나온 날들을 회개하며 주님의 크고도 넓은 사랑에 젖어서 혼자서 흐느껴 울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한 후에 세상에서 이루어보고 싶던 나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나의 눈에는 오직 주님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나는 결심하였다. 아버지의 심한 반대를 무릎 쓰고 시작한 신학교 생활은 그리스도로 충만한 생활을 경험케 하였다. 신학공부를 하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나를 쓰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었고 캠퍼스 전도와 양육 그리고 개교회 전도사로서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데

  어느 날인가는 우연히 보게 된 선교용 비디오 테이프에서 그리스도께 헌신된 한 독신 여성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을 통해서 수천 명에 이르는 한 족속이 모두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왔고 그 사람들 중 어느 할아버지가 하던 말씀이 계속해서 나의 뇌리에 맴돌기 시작하였다.

  “왜 이제야 왔습니까?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옛날 우리 조상들도 이 소망의 소식을 듣기를 고대하여 멸망 가운데 죽어 갔는데 당신은 우리로 하여금 왜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했습니까?"  그 비디오 테이프를 본 후에, 나는 선교에 대하여 큰 도전을 받았고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심한 심적 부담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시작되었다.

  선교사가 되기로 헌신을 한 나는 1년 반만에 타문화권 선교사 훈련을 받고 91년도에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6개월 간 현지 언어를 배웠고 선배 선교사님이 하시는 사역에 합류해서 돕게 되었다.
  내가 사역하는 인도네시아는 13600 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섬나라이다. 2억이 넘는 인구와 인구의 85%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회교도들 그리고 12%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토착 종교와 혼합돼 복음의 능력을 상실해 버린 영적으로 황폐하고 척박한 땅이다.

  교회는 있지만 그 수에 비해 전임 사역자들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부족한 일꾼을 길러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선배 선교사님과 함께 시작했던 신학원에서 학생들을 모집하고 열심히 가르치며 양육했다.  많은 기도가 뒷받침 해 줄 때 주님은 종종 마음이 준비된 회교도들을 만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시어, 그들도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셨다. 몇 년이 채 안돼서 햇병아리 선교사이던 나는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와 함께 찾아온 열대 풍토 병중 하나인 열병에 걸리게 되었다. 온 몸에 열꽃이 피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 아프더니 이내 쓰러져 3일씩이나 일어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떨어졌다.

  열꽃이 가시기 시작했을 때 이제는 아예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하는 불면증이 찾아왔고 음식을 먹을 수도 전혀 없었고 심지어 물도 삼킬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베개에 머리를 대기만 해도 금새 잠들어 버리던 나는 밤이 오는 게 두려웠으나 사역을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발바닥이 허공을 떠다니는 것 같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사역을 하다보니 병 증세는 계속해서 악화되어갔다.

  그때는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라는 기도가 저절로 입에서 나왔었다. 어렵게 병가를 얻어 한국에 귀국
했고, 집에서 쉬거나 약을 먹는 대신 하나님께 해결 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찾았던 강남금식기도원

  강남금식기도원을 처음으로 찾았던 것은 96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였다. 한숨도 자지 못하는 불면증이 이미 한 달이나 지속되어 나를 괴롭혔지만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위로를 받았고 찬양 속에서 주님을 만났었다.

  일주일 금식이 끝나갈 즈음 하루에 2∼3시간씩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하나님께서는 회복시켜 주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이곳에서 두 주간을 더 보내며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졌었는데 마치 나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시듯 완전히 회복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교지로 돌아가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었다. 말씀에 순종해서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때는 예전과 같이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할렐루야!

  이제 제2기 안식년을 끝내고 7월 31일 제3기 사역을 위해 인도네시아로 재입국을 앞두고 예수님의 심정으로 충만해지고자 기도원에 다시 나는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선교지에서 얼마나 치열한 영적 전투가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간증을 마치고자 한다.

  얼마 전 인도네시아의 내가 사역하던 신학교에 무장 회교도들에 의해 학교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2명의 신학생이 숨지는 큰 사건이 있었다. 세계는 지금도 종교 분쟁으로 죽이고 죽는 일이 이처럼 계속되고 있다.
  이방인들에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불에 타고,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상황 가운데 있다. 이 핍박과 순교는 마치 초대 교회의 박해를 방불케 한다.

  마지막으로 나에게 인도네시아의 영혼을 사모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선교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그 땅을 섬길 것을 이 시간 다시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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