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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신춘 간증공모 입상작]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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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인숙 집사님의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는 간증문입니다. 귀한 은혜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따르르르릉!"
"엄마, 아들 대학 합격"
짤막하지만, 오랜만에 밝고 힘찬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힘찬 목소리를 들어본 것이 얼마만인가! 실로 아들의 합격 소식은 나에게 너무나 큰 감격으로 다가왔다.

원서를 낼 때만 해도 안전한 곳에 넣으라는 나의 염려에 "안전빵이야, 안전빵!”하면서 큰 소리치고, 애들 아빠도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눈치여서 원서를 낸 후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왔었는데, 막상 발표날이 다가오자 온 가족은 조금씩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다시 공부를 하기도 어려운데…….’'다시 병이 심해지면 안되는데…….’ 하면서 서로가 말없이 눈치만 보며 있었는데 장하게도 아들은 아픔을 딛고 합격을 이뤄낸 것이다.
환난 날에 초막 속에서 비밀히 지켜주신다더니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 가족에게 기쁨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들의 힘찬 목소리를 듣고 감사밖에는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저 하나님께 감사했고, 아들이 고맙고 기특할 뿐이었다.

꼭 1년 반 전이었다.
"엄마, 나 대변볼 때 피가 나와." 하면서 아들은 말을 건네왔다. 밤 11시나 되어야 집에 오는 엄마가 걱정할까봐 제 딴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병원에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했더니, 병원을 두군데나 다니면서 약을 계속 먹었는데도 낫지를 않는다며, 의사가 큰 병원에 가보라니까 그제서야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얼마 전부터 하루에 몇 번씩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도 부모가 걱정할까봐 제 혼자 병원에 다니면서 병을 고쳐 볼려고 했던 것이다.

늘 당당했던 우리 아들, 무슨 일이든지 자신만만해 했고 불의를 보면 나설 줄 아는 멋진 우리 아들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5-6㎏이나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부축해 병원을 나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참으로 부족한 엄마는 아이가 혼자 걱정하며 병원을 다녔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지내온 자격없는 엄마였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 귀엽지 않을까마는, 우리 아들은 유난히 속이 깊고 심지가 굳은 아이였다. 밤 늦도록 장사하는 엄마가 안쓰러워 늘 엄마 마음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아이여서 아들로 인해 마음 상한 일 한 번 없이 늘 기쁨이 되었던 아들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닥쳐온 아들의 고통은 참으로 안타까웠고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 아픔이 긴 고통의 시작이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급하여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밤 늦게 퇴근한 내 손을 잡고 제 방으로 끌고 들어간 아들은, 책상 앞에다 붉은 색연필로 커다랗게 '연대 간다’고 써놓고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폰을 반납하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여자친구도 대학가서 만나기로 했다며 "엄마, 나 오늘부터 공부할거야" 하고는 책상에 앉아 꼼짝도 않는다.
그랬었다. 아들은 다른 아이하고는 조금 다르게 한번 마음을 먹으면 반드시 하는 아이였다. TV, 컴퓨터, 비디오를 늘 옆에 끼고 있던 아이가 모든 것을 덮고 이른 새벽부터 아이의 방에는 불이 켜졌고, 밤늦게까지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아이가 계획한대로 모든 것은 잘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런 변고가 생긴 것이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아들에게 탈이 난 것이다. 결국 6일 동안 치르는 기말고사를 다 치르지도 못하고 3일째 되던 날 자리에 눕고 말았다. 보름 동안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앓고 난 아이는 걸음을 옮기기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학생회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포항 석병교회에서 가진 학생회 수련회에 참가하겠다고 나섰다. 붙잡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보낼 수도 없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얼굴에 억지웃음을 지으며 수련회길에 올랐다.

하지만, 둘째날 새벽 걱정이 되어 찾아간 나에게 "엄마, 나 집에 가야겠어.”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이 한 마디의 절규는 아픔의 첫 시작이었다.
의사도 손을 든 상태였다. 그 때부터 물조차 마시지 못하는 가운데, 뒤틀리는 아랫배를 움켜잡으며 눕지도 앉지도 못한 채 임산부의 산고보다도 더 고통스럽다는 아픔을 혼자 견뎌내고 있었다. 불과 20여일 사이에 아이는 몸무게가 15㎏이나 더 빠져 이제는 일어나 앉지도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그 어떤 아픔이라도 대신하겠는데, 부모가 되어서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셨는데도 방문을 열어주지도 않은 채, 불도 켜지 못하게 하며 혼자 고통을 견뎌내는 그 모습은 너무나 처절했고, 아무 방법이 없는 상태로 쳐다만 보아야 하는 우리는 하나님께 엎어질 수 밖에 없었다.
장손(長孫)의 고통을 보고 가신 시부모님은 새벽기도를 다녀오시면 다시 뒷산에 올라가셔서 손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시며 찬송가 528장(주의 아들 병든 몸을)을 부르고 또 불러 목이 다 쉬셨고,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눈물의 기도가 이어지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깨달았고 감사의 기도가 터져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랑스런 아들에게 이렇게 큰 고통이 왜 찾아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과 나는 성장할 때도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고, 결혼 후 지금까지도 줄곧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하여 이 고통 앞에서 당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신앙생활도 부족함 없이 그저 감사할려고 애써왔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어 기도의 문마저도 닫혀 있었다. 그런 우리 가족을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으시고 살 길을 열어놓고 계셨던 것이다.

인간의 생각을 앞세웠던 나의 교만으로 인해 아들이 고통당한다며 용서해달라는 부르짖음에 아들은 왜 부모님이 잘못했냐고, 이제 내가 교만했음을 알았다고 고백하기까지에는 그렇게 많은 날이 흐르지는 않았다.
요셉이 환도뼈가 상하기까지 하면서 하나님과 처절한 싸움을 했듯이 아들과 하나님과의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시작된 기도가 어느 곳에서든지 있는 그 장소가 이 아이의 기도의 장소가 되었다.

늘 학교 생활이나 학원 생활을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세상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고, 하나님을 찾을 때는 의무감과 형식적인 마음으로 대했던 아이에게 하나님은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가와 주셨다. 
그러면서도 배를 뒤틀리게 하는 고통이 찾아오면 아무도 침대 근처에도 못오게 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이 2-3일씩 이어지곤 했다.
그러기를 10개월여, 아이는 새봄과 함께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많이 회복이 되었고, 제법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가 된 5월 어느 날, 자기처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한의대'로 진학하겠다며 책상 앞에 다시 앉는 것이 아닌가.

늘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가 의자에 앉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었다. 조금 회복이 되었다지만 아직 10㎏이상 체중이 줄어 뼈만 남은 엉덩이와 등이 아파 의자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며 의자를 사 달래서 새로 들여놓았지만, 자기자신과의 싸움을 얼마나 처절하였을까?
6월이 되면서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이 되자 공부하는 시간이 제법 늘어갔다. 종일토록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혼자 밥과 죽을 챙겨 먹으면서도 시간이 없다며 엄마에게 전화도 하지 말라는 아이가 때로는 야속하기도 했지만, 미안한 마음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낮에 공부하다 쉬는 시간이 되면 쑥뜸을 뜨면서 인터넷 강의를 들었고, 저녁이 되면 양쪽 손에 백여 개의 수지침을 꽂은 채 입으로 책장을 넘기며 공부하는 가운데서도 아이는 하나님께 붙잡힌 신앙의 아이로 변해 있었다. 가족 아무도 모르게 틈틈이 시편과 잠언서를 몇 번씩이나 읽었고, 이제는 세상을 향한 자신감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순종과 겸손이 아이에게 새로운 용기와 자신감을 주고 있었다.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9월 초순 전국모의고사가 있던 날, 학교측의 배려로 1년 2개월만에 학교에 등교를 해서 아이들과 함께 모의고사를 볼 수가 있었다. 학교를 향하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눈물이 앞을 가려 모의고사 잘 보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다시는 학교에 보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비록 학교는 그만 두었다지만, 그래도 건강이 회복되어 한쪽 귀퉁이일지라도 교실에서 제 친구들과 함께 시험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지만 그 기쁨은 한 나절이 채 가지 못했다. 다른 아이들은 더워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시험을 보는데, 아들은 교실에 있는 체육복을 있는대로 다 덮어써도 추워서 견뎌내지 못하고 2교시 중간에 집으로 오고 만 것이었다.

10월에 모의고사를 두 번 더 볼 수 있도록 학교측에서 배려해 주었지만, 결국 한 번도 끝까지 시험을 다 보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와 그동안 왕성했던 자신감 마저도 많이 약해져 갔고, 마음도 몸도 지쳐 가고 있었다. 결국 다시 몸이 많이 좋지 않아 걱정을 하던 중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수능일은 다가왔다. 수능 전날 밤, 우리 가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간절한 예배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아침에 고사장인 경북외고로 향하면서도 그저 오늘 하루 시험을 끝까지 다 볼 수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수능 보는 목적은 대학을 가기 위함이 아니라 시험을 끝까지 치루어서 우리 아들이 자신감만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마음이었다.
아들을 고사장으로 들여보낸 후 중간에 뛰쳐나올까봐 얼마나 마음졸이고 지낸 하루였던가.
남편은 근무를 하면서도 휴대폰이 울릴까봐 종일 조마조마했단다. 왜냐하면 학교 앞에서 대기하던 제 누나에게서 전화가 오면 이것은 중간이 일이 생긴 것이니까 전화가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단다.

천년같기만 하던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 6시가 조금 못되어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나 재수할거야"하는 아들의 기운찬 목소리.
그랬구나, 시험을 끝까지 다 치고 나왔구나. 장하다, 우리 아들. 재수면 어떻고 삼수면 어떠하냐, 괜찮다 아들아, 정말 끝까지 다 마치고 나왔단 말이지, 하나님은 살아계셨고, 우리 아들을 통하여 다시 한번 더 그 은혜를 보여주셨다. 전화기에 대고 횡설수설하면서 눈물이 또 나왔다. 아들의 아픔으로 울보가 되어 버린 나는 틈만 나면 눈물이 나왔다.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조차 없는 순간이 지나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무릎을 꿇은 나에게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오셨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아직까지도 한의대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부모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원서를 기꺼이 낸 우리 아들, 할아버지께 합격의 전화를 드리며 연신 "껄껄껄!, 껄껄껄껄!하며 시원한 웃음을 선사하는 아이.
그러나 아직도 아이는 몸이 성치 않다. 어쩌면 평생토록 이 고통을 안고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말한다.
"비록 건강을 잃었지만, 대신 강한 의지를 얻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롬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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