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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능력주시는 자에게서 채득한 기도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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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력주시는 자에게서 채득한 기도의 위력  >>>

                                                                  - 류태영 박사 (건국대 교수, 대산농촌 문화재단 이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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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자녀로 출생, 역경 중에도 신앙 잃지 않아
복음에 입각한 의식개혁 운동 전개에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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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살림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 맞서 극복할 수 있는 역경이다. 책을 쓸 때나 강연을 할 때나 나는 많은 이들에게 도전하는 정신을 가르쳐 주고 싶다. 이스라엘에서의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유태인의 가정 교육법에 대한 책을 냈다. 어느 민족보다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가정교육은 어떤 면에서는 우리네 자녀교육과는 상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남1녀를 둔 우리 가정에서 공부하라는 강요는 전혀 없었다.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교육방침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녀들로부터 사랑이 없다, 관심이 없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예수님 잘 믿고 인생에 대한 확신을 갖기만 하면 된다는 내 뜻을 이제는 잘 이해해 주고 있다. 어렵지만 스스로 개척한 인생길에서 발견한 다양한 경험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기에 자녀들에게도 이같은 노력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최종 목표로 하고 있는 일은 국민정신운동-의식개혁운동-이다. 우리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공동체의식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약하지만 나는 지난 27년 동안 최선을 다해 장학금을 얻어서 학생들 유학보내기에 앞장서왔다. 나 자신은 힘들게 개척했지만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좀더 넓은 세상에서 마음껏 자신의 일을 펼쳐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새마을운동 지도자라는 별칭을 얻기까지의 내 인생여정에는 하나님이 동행하셨다. 신발이 없어 맨발로 다니고 먹을 것이 없어 소위 물구-우리 시골에서는 봄이 되면 난초꽃같이 피는 식물이 있었다-뿌리를 캐어 죽을 쑤어 먹던 형편에 중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다.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해서 우리 식구가 근근히 살았다. 나 역시 머슴살이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나는 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 불쌍한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제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지혜의 문을 열게 해서 일생동안 공부를 끝까지 하게 해 주세요.”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네가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현존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라. 현재 네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이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독학을 하며 공부를 쉬지 않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삼년쯤 지난 어느날 읍내 유지댁 가정교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열여덟살의 나이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는 서울로 왔다. 6.25 전쟁 직후의 서울 인심은 각박했다. 구두닦이부터 시작해 신문배달, 아이스크림 장사, 빨래비누 장사…. 정말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번 돈은 야간고등학교 수업료로 들어갔다. 밥은 굶더라도 공부는 쉴 수 없었다. 그때도 나는 일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다. 거기엔 20년, 30년 후의 나의 자랑스런 자화상이 살아 있었다.

매일을 기쁨으로 살았다. 어제를 잘 극복했으니 감사하고, 오늘도 이 시련을 잘 극복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기뻤다. 능력과 소망과 인내심이 끊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
삶에 대한 계획도 철저했다. 매월 초에는 월훈을 정하고 빠듯하게 예산을 세웠다. 그리고 월말에는 철저하게 결산을 해서 한푼이라도 제대로 썼는지 점검했다. 우여곡절 끝에 야간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난생처음 유학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유학을 목표로 세우고 하나님께 매달렸다. 

한 나라에 가서 공부하기도 힘든 시절, 나는 덴마크와 이스라엘에 가서 공부를 했다. 미국과 일본에 편중된 유학풍토에서 덴마크라는 미지의 나라를 선택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묻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결과였다. 나는 우리나라 농촌이 잘살게 하는 것을 공부하고 싶었다. 기도하던 중 유달영 박사가 쓴 「새역사를 위하여」에서 덴마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기도 응답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농촌의 문제점과 대책」이라는 주제로 장문의 논문을 쓰고 내 사정을 적고 사진까지 넣어 백과사전에서 찾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9세에게 무작정 편지를 보냈다. 한달 후 왕실에서 답장이 왔다. 내가 원하는 기간, 장소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덴마크 정부가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먼저 그 나라 말부터 공부하기 위해 언어코스과정을 소망했고 이렇게 해서 나는 덴마크로 떠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에 비해 월등히 잘사는 모습을 보고 이스라엘에서 다시 공부할 뜻을 세웠다. 이스라엘 정부에 보낸 편지 또한 통과되어 나는 이스라엘 국비 장학생으로 갔다. 나름대로 터득한 외국어에 대한 요령을 여기서도 적용해 보았다. 3개월에 일상회화를 끝내고 6개월만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내겐 참으로 독특한 집중력이 있다. 그 집중력이 발동하면 도서관에서 계절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공부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세계 10대 대학으로 손꼽히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자 교수로도 초빙을 받아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에서 몇 년 동안 사회학을 가르치고 돌아왔다.

이렇게 힘들지만 보람찬 유학생활을 마치고 와서 나는 건국대학교에 뿌리를 내리고 열심히 내 학문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하나님께서 주신 내 가치를 깨닫고 그 가능성 개발에 전력을 다해온 지난 세월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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