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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스님이 전도해 예수를 믿고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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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전도해 예수를 믿고나니...

- 김재분 권사(78세, 남서울 교회,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


온갖 방법으로도 고침받지 못한 나를 고쳐주신 하나님

  나는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리 집안은 당시 다들 그랬듯이 유교와 불교를 두루 두루 믿었다. 집안이 좀 부유한 편인데다가 여자아이가 나 하나여서 귀여움을 받으며 별 고생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 20세에 이삼십 리 떨어진 근방 마을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당시 아직 학생이어서 나는 시부모님과 시골에 살면서 남편과는 떨어져 생활하였고 남편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직업군인이 되었기 때문에 떨어져 사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시집은 퍽 넉넉한 편이었지만 나는 밤낮으로 집안 일에 들일까지 해야 했고 밤으로는 바느질에, 베 짜고, 방아질을 하는 등 힘든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 마을 보통의 여자들이 모두 하는 일이었지만 한 번도 궂은 일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너무나 힘든 일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26살에 몹쓸 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병원에서는 원인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을 어른들이 초학이라고도 하고 학질이라고도 부르는 말라리아였던 것 같다. 그러나 보통은 그 병을 다들 귀신들린 병이라고 했다. 하루는 죽을 것처럼 앓고 하루는 밥 먹고 일 할만큼 괜찮고, 한나절은 떨고 한나절은 괜찮고 하는 증상이 정말 귀신들린 것처럼 보이는 탓이었다. 나는 그 병을 육 년간 앓았는데 나중에는 몸이 바짝 마르고 사람 구실을 못 할만큼 형편없어졌다.

  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시아버님께 "친정에 가서 병을 고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버님 진지상도 못 봐 드리고 이래 같고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시아버님은 "야야, 니가 벽을 지고 앉았어도 괜찮타. 저 아들은 다 우얄끼고. 내 니 필요한 거 다 해 줄꼬마" 하시는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네 명의 아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아버님은 나를 위해 점치고, 굿하고 하는 갖은 미신 숭배를 하셨고, 뱃속에 들어있던 송아지며, 염소, 사슴 등을 구해 먹이셨다. 그러나 내 병은 나아지질 않았다.
  결국 나는 시아버님이 낚시 가신 틈을 타서 편지 한 장을 써놓고 밑의 아이들 둘만 데리고 친정으로 향했다.
  친정에서는 나에게 내가 시집가서 아이를 낳다가 죽은 시누이 귀신이 붙었든지, 폐병일거라며 쌀 한 가마니와 함께 절에 데려다 놓으셨다. 아이들에게 전염될 것을 걱정하신 것이다. 절에서 49일 동안을 음식을 해 놓고 절을 하고 불경을 외워도 내 병은 나을 줄을 모르고 오히려 더 심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는 절 뒤편에 있는 바위에 앉아 아주 어렸을 때 빵 얻어먹을 요량으로 친구를 따라 가서 배운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왜 찬송가를 부르게 되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지나가던 스님이 듣고는 대뜸 "아니, 여보, 김 선생 예수 믿소" 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요, 저 예수 안 믿어요. 근데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귀신도 떨어진다고 하는데 저 예수 믿으면 좋겠어요. 다들 저더러 내게 붙은 귀신을 모시고 점쟁이나 무당이 되야 병이 낫는다는데 전 죽어도 싫어요." 하였다.
  그랬더니 스님은 "그럼 한 번 믿어보소. 난 암만 해도 안되니..."
  이미 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 본 뒤라 나를 포기하신 것 같았다.

  나는 휴가 나온 남편에게 부탁하여 집안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었던 당숙모가 계신 김천으로 갔다. 내가 가자 당숙모는 "시집오니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니 너라도 이래 믿는다니 좋다. 잘 왔다" 하시며 기껍게 내 뒷바라지를 해 주셨다.
  나는 당숙모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사님도 보기 싫고, 말씀도 듣기 싫고, 그저 졸음만 올 뿐이었다. "야야 저 말씀 좀 들어봐라." 하는 당숙모의 채근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좀 지났을 때 당숙모는 나를 신유 은사가 있다는 어떤 분의 부흥회에 보내셨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밀려 교회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일주일을 교회 밖에만 맴돌았다. 대구에서 다음 집회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대구로 갔다. 그곳에서도 부흥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기를 쓰고 교회로 들어가 예배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나는 앉은뱅이며 문둥병자가 고침 받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부흥회가 다 끝나도록 나는 기도도 받지 못하고 낫지 않은 채였다. 나는 부흥회가 끝난 후 부흥사님이 심방가신 집을 찾아가서야 그 분의 기도도 받고 예배도 제대로 드릴 수가 있었다.

  이 후 세 번의 예배를 드리는 중에 나는 내 병을 고침 받게 되었다. 마지막 예배를 드린 후 그 분이 하신 말씀은 "집에 가거든 가까운 교회에 가서 열심히 예수 믿고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시는 것이다. 이후로 지금까지의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고 나서도 나는 쉽사리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예수 믿는 사람도 없고 갖은 미신이 있는 곳으로 가기가 무서웠던 것이다. 한 참을 더 당숙모 집에 머물면서 교회도 다니고 여러 집회도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기도 중에 영화필름을 돌리 듯 지난날의 잘못을 보이시며 회개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난 후에야 나는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내 모든 삶의 중심이 예수가 되었고, 그 이름으로 이기지 못 할 것이 없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어...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어 돌아가자 시댁에서는 외며느리가 살아왔다며 반가이 맞아 주셨다. 내가 집에 처음 한 일은 구석구석에 있는 귀신단지와 사람 형상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예수 믿지 않으면 다시 아플 거라는 내 말에 시아버님도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삼 십 리나 떨어진 교회를 나가 주일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너무 멀어 수요예배나 저녁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는데 그럴 때면 내 몸은 마치 불덩어리에 맞은 듯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뒤 뜻 뽕나무밭에 호롱불을 옮겨 놓고 혼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 성경 읽고 찬송 부르기를 한 동안 하니 동네 아이들이 한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서른 명 가까운 아이들이 나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 공책에 찬송가를 써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성경도 읽어 주었는데 아이들은 그게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예배 드리던 어느 날 시아버님은 지게 작대기를 들고 모여있는 아이들을 쫓으시며 "예수 믿을라면 혼자나 믿지 와 니는 아들은 데리고 뽕나무 밭은 다 망치고 이기 무슨 짓이야.  에이. 이 놈들 어여 집에 가 어여" 하시며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그 후로 나는 방천으로, 뒤산으로 여러 번 예배처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예배처를 갖고 싶은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 때는 마을 청년 일곱 명이 아이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 예배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내가 산에서 흙을 가져다가 물을 부으면 청년들이 그것을 이겨 벽돌을 찍어냈다. 꼬박 보름 밤을 일하자 우리는 육 백 장의 벽돌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것으로 벽을 올렸다. 나는 집집마다 돌며 볏짚 두 단씩을 얻어다 지붕을 이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바닥도 가마니고, 문도 가마니를 단 것에 불과했지만 예배처를 얻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예수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하며 쑥덕거렸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내가 집 안 살림도 소홀함이 없었고, 또 예수 믿지 않으면 아플거라 하니 어쩌지를 못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지 서너달이 지났을 때였다.
  주일이면 교회에 가고 못 갈 때면 예배처에서 예배드리는 생활이 계속되던 중에 전방에 있던 남편이 대구 본부중대장으로 오게 되었다. 남편은 나에게 대구로 함께 가자고 하였다.
  "목사님도 안 계시는데 서른 명이나 되는 아들은 어쩌고 내가 대구로 갑니까. 난 안 갈랍니다." 하였다.
  그 무엇보다 내겐 예수님이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들으신 목사님께서 우리 마을 예배처에 와서 예배를 드려주신다는 말을 듣고서야 남편을 따라갈 수 있었다.

  예수 마을, 예수 꾼들 그렇게 그 곳을 떠난 지 수년이 지나 그 곳에 가보니 번듯한 교회가 세워지고 시무하시는 전도사님도 계셨다. 게다가 백 명이 넘는 성도가 생긴 것이다. 이 후로도 전도가 계속되어 온 마을이 예수 마을이 되어갔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옷을 모아다 가져다 주면 예수 옮는다며 내가 돌아가자마자 새 것같은 옷들을 서슴없이 태워 버리던 올케도 권사가 되었다. 시댁 식구들도 모두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이다.

  처음 나와 함께 예배처를 만들던 그 일곱 명의 청년들은 지금 목사로, 전도사로, 장로로 모두들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고, 그 곳도 열심있는 지역으로 소문이 자자하다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지금 한 평생 나와 함께 하시며 놀라운 일들을 이루셨던 하나님께 감사하고, 얼마 남지 않은 내 남은 시간 속에서 그 분의 일을 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 출처 : 강남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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