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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부끄러운 자리에서도 만나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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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자리에서도 만나주시는 하나님
   
- 유민식 집사 (남, 54세, 주찬양교회,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

 
혼자 해야 했던 투병생활
 
  만 4년 전,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고 있을 때였다. 필요한 서류 중 건강진단서를 준비하기 위해 검사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늑막염이라는 판정을 받아 중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차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매우 급하고 한 장소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을 아주 못 견뎌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 받는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일주일도 안 되어 퇴원을 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통원치료를 받으며 다른 검사들도 해보았는데, 그전부터 있었던 당뇨증세가 더 심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당뇨 치료도 함께 받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폐에까지 이상이 있음이 발견되었다. 병원에서는 그 폐의 기능을 살리려면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다른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약간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몸의 체력 상태가 괜찮은 편이라 수술은 가능하다고 했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아내와 자녀들은 계획대로 외국으로 나갔고 나는 혼자 남아서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수술이 끝나고 깨어났을 때, 나는 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담당의사는 폐를 잘라내게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그렇게까지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며 빨리 완쾌되는 일만 남았다고 환한 미소로 위로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수술후유증으로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 고통은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거동을 할 수 있게 됐을 즈음 퇴원을 하여 아무도 없는 별장으로 갔다.
  가족들은 모두 외국에 나가있고 나는 혼자서 너무도 외로웠다. 몸에 통증이 올 때면 맘껏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만 빼고는 혼자 지내는 자유로움은 외로움과 무료함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감옥이었다.

  3개월 후, 나는 그리워하던 가족 곁으로 갔지만, 제대로 거동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내가 창피했던지 아내는 산책할 때마다 혼자 앞서가기 일쑤였고, 나를 무시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그런 아내에게 서운한 맘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아내는 정신질환에 걸려 사람도 못 알아보고 이유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었다. 나는 아내를 고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 강남금식기도원의 소문을 듣고 아내를 데리고 가서 금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아내를 잡고 있던 귀신이 떠났고 하나님께서 정상으로 치유해주셨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아플 때 병원 근처에도 오지 않았으면서 미안한 기색도 없고, 오히려 나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러니 나의 서운함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측은한 마음이 어느새…
 
  그럭저럭 내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을 때, 우리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와 전부터 하던 미술학원을 다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학원에 여 선생 한 명이 새로 들어왔는데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참한 아가씨였다. 그런데 하루는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쳤다며 며칠동안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학생에게서 받은 학원 수강료를 주머니에 가지고 있었는데 병원비등으로 다 써버리고 말도 못하고 있다가 장부를 보던 아내에게 발각되었다. 아내는 돈을 갚고 사표를 쓰라고 했지만, 값을 형편이 안 되어 한 달에 10만원씩 1년간 갚아나가는 조건으로 학원에 남게 되었다.

  나는 그 여 선생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갚으라며 아내 몰래 조금씩 돈을 주었다. 그녀는 안 받으려 했지만 나는 억지로 주었고, 그 결과 6개월 만에 그 돈을 모두 갚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 1년 후, 그녀는 다시 학원으로 찾아왔다. 이혼하여 혼자가 됐는데 갈 곳이 없다며 학원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온 것이었다. 아내는 그녀의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열심히 일함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 주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던 나는 능력껏 활발하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성격은 비록 급하지만 가정적이고 여성적이며 자상한 반면, 아내는 가정적이기보다 활동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싸울 일이 있어도 가정에서 큰소리가 나는 것이 싫어 늘 참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학원도 아내의 주도로 운영이 되었다.
  그런 아내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그녀가 강자의 힘에 의해 짓눌리는 약자처럼 불쌍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그녀를 보살펴 주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좋아하는 맘을 갖게 되었다.

  나는 몸도 건강하지 않고 나이도 많은데다가 그녀는 앞길이 창창한 젊은 사람이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알지만 나는 짝사랑에 빠져 혼자 괴로워하다가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결국 그녀는 영문도 모른 체 곧 사표를 써야했고, 나는 나 때문에 그녀가 내쫓겼다는 사실에 마음이 많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길이 열려 캐나다 이민 신청을 해놓고 기다린다고 했다.
 
날마다 기도원으로…
 
  나는 그 일 이후, 날마다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아와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다. 어떤 날은 오전에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후에 와서 철야까지 마치고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가운데 내 속 사람은 변화되어 갔고,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만났다.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이런 간증을 하게 된 것은 나와 같이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도 그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며 도우심을 빌었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위로로 만나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았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가정이 병들은 사람들을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그 상함을 고쳐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주님을 찬양토록 인도하심을. 그 동안 내 몸이 병들어 고통을 받았으나 그때는 주님의 부르심을 깨닫지 못하였고 어리석게도 주님을 찾고 의지할 줄 몰랐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을 뿐더러 마음으로 간음죄를 짓는 더 부끄러운 자리로 내려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부끄러운 자리에서도 나를 만나 주셨다. 죄 사함을 받고 마음의 자유함을 얻은 나는 감사와 기쁨이 넘쳤고, 몸의 건강도 점차로 회복이 되었다.

  내가 이 일로 기도원에 다니는 동안 아내는 아내대로 골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였고, 골이 깊었던 가정의 불화가 화목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부족하고 우둔한 나를 깨우쳐주시고 우리 가정을 구원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

  우리부부는 결혼 후 20년 동안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상 나는 주님이 어떤 분이 신지 믿음도 없이 그저 아내를 교회에 태워다 주는 운전기사 노릇만 하고 있었다. 교회를 다닌 지 20년 만에야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혈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증표요, 참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렐루야!

  나는 앞으로도 주님이 허락하시는 데까지 날마다 강남금식기도원에서 예배드리고 철야기도 하는 일을 계속할 작정이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죄 가운데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을 증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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