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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고난중에 만난 예수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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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인 출생



창 밖으로 온 도시를 눈이 하얗게 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눈에 대한 느낌은 뛰어 노는 강아지처럼 마냥 즐겁기만 하였는데 지금 창 밖에서 내려다보이는 함박눈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한 적막감과 외로움만이 마음에 밀물같이 밀려옵니다. 지난날의 힘겹게 살아왔던 모습과 앞으로 하고픈 간절한 희망마저도 허물어져 가는 순간들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비극적인 삶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삼일도 안된 핏덩어리인 채로 법정에 서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머니가 둘이고 아버지가 둘인 가정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콩쥐팥쥐 가정 속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쪽 국수 공장에서 그 집의 자식들과 차별을 받으면서 그 집 아들들은 일을 안 해도 야단 안 맞고 저는 일을 해야만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라다보니, 빚 때문에 저를 버리고 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로 베개를 적셔야만 했습니다. 밤하늘에 별을 쳐다보며 왜 이 세상에 태어났나 하는 원망과 아픔을 혼자서 감당하며 슬픈 나날을 보내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아무 유언도 없이 제가 6학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코피를 쏟을 정도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 집은 국수공장과 떡 방앗간을 하여서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별 수 없이 그 일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면서 저는 힘들게 태안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납부금 때문에 더욱더 고통이 컸습니다. 그 집 형제들은 납부금을 다 내고 나는 서무과에 여러 번 불려갈 때가 되면 그제야 납부금을 낼 수가 있었습니다. 교복도 없어서 낡은 옷을 입어야 했고 체육복이 없어서 체육 시간에 혼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이 형제들이 체육이 들지 않을 때면 형제들의 체육복을 입고 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보니 경제적 고통과 형제 차별의 불만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중학교 때는 싸움꾼으로 전락했고 일부러 학생들을 시비 걸어 싸움하곤 했습니다. 모든 불만과 스트레스를 운동을 하며 풀었습니다.

학교에서는 불우학생이라 하여 검정운동화와 공책을 주었고, 납부금을 면제 받아가면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점심 시간에는 도시락 대신에 수도꼭지로 배를 채웠고 슬픔과 괴로움을 운동(태권도)을 하면서 달랬습니다. 마음속에 결심한 것이 있다면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 것 이외는 저의 마음속에 어떠한 것도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가출과 방랑의 시작

어렵고 힘들게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혼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잘 벌리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만 했습니다. 공사현장에 잡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도 그 당시에는 일하는 것에 비해 인건비가 너무 적어 보험회사에 취직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보험은 인식이 되지 않은 상태여서 차비도 안 나올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이것으로는 돈을 벌지 못한다는 마음에 돈에 사무친 저이기에 그 당시 돈이 잘 벌린다는 강원도 탄광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그곳에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체력으로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곳을 떠나 배를 타러 마산에 갔다가 그것도 안되었고 결국에는 술집에 취직하였습니다. 낮에는 자고 밥에는 술집에서 일해야 했고, 오색불빛이 찬란한 밤업소에서 맥주병을 옆에 차고 이리 뛰며 저리 뛰며 퇴폐풍조의 선봉주자가 되었고 몸은 술독이 되었고 담배를 수없이 피어대며 몸을 학대했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면서 저의 마음은 될 때로 되라, '어차피 인생도 한번 왔다 한번 가는 것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하는 생각에 저의 모습은 완전히 밤업소의 불빛 돌아가듯이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저 자신을 학대했습니다. 술과 담배로써 하루하루 인생을 살았고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원망했고 아무 의미 없이 낳은 아버지를 저주했습니다. 무책임하게 낳고 돌아가신 아버지한테는 산소에 가서 "아버지 왜 날 낳으셨나요" 울어 보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 생활에서 제일 외로운 것이 명절 때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고향에 가는데 저는 자취방에서 소주 한 병과 라면을 끓여 먹는 슬픔, 괴로움, 외로움이었습니다. 그것은 경험 해본 사람만이 느낄 것입니다. 저는 세상을 막 살았고 많은 술집여자들을 상대했고 그들의 마음을 위로했고 그들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제 옆에는 아가씨들이 줄지었고 저는 그런 생활들이 좋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다방 DJ를 하는 여성과 사귀고 있었는데, 어떤 돈 많은 여성이 현금 1억원이 든 통장을 들고 저를 좋아하여 무섭게 쫓아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 여인을 피해 다녔습니다. 돈을 벌러간 처지에 왜 돈이 많은 여자를 택하지 않았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돈이 많은 여인보다 멋진 음악을 틀어 주는 그 여인이 좋았나봅니다. 묘하게도 돈이 많은 여인이 무섭게 쫓아다니는 것을 피해 서울로 올라오다 보니 그런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천호동에서 별의별 장사를 다 해보았습니다. 포장마차, 화장지장사, 채소장사 등등 돈이 될만한 장사를 다해보았지만 돈은 그렇게 생각했던 대로 쉽게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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