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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남은 생애도 불꽃처럼 쓰임 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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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애도 불꽃처럼 쓰임 받기를

          - 표영 집사님 (여, 52세, 영락교회, 은평구 녹번동) 영적인 선교사 -


  우리 집은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예수님을 믿어왔다. 아버지는 자타가 공인할 만큼 소문난 효자셨고 우리에게도 항상 자상하셨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님이셨다. 나는 가족의 영향으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기독교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을 버리고 전 재산을 챙겨 어떤 여자와 외국으로 떠나버리셨다. 평소의 아버지만을 기억하고 있는 남은 가족들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나는 그때 교회에 다니며 직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아무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고, 직분을 가진 자에 대해 많은 실망을 했다.

  그래서 나의 배우자는 믿지 않는 사람 중에서 선택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인간성도 좋고 세상 적인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사람을 찾았고, 그런 조건에 맞는 사람과 결혼을 했다. 배우자는 종손이기는 했지만 수재였고 세상적인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었기에 나는 흡족했다. 그러나 막상 면사포를 쓰는 순간 여러 가지 면에서 영적인 대립이 느껴졌고 ‘아! 이게 아니구나.’라고 깨달아졌다. 그래서 난 그 자리에서 굳은 결심을 했다. ‘그래, 내가 이 가정에 영적인 선교사로 파송된 것이다. 내가 이 가정에서 할 일은 영혼구원에 힘쓰는 일이다.’라고 재삼 결심을 굳힌 가운데 결혼식을 마쳤다.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두 아이를 출산하는 동안 내가 살림도 잘하고 일도 열심히 해서 재산도 늘어나면 남편을 비롯한 시댁 식구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거라는 나름대로의 선교 전략을 세워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그래서 가정의 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 의류사업을 시작하였고,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미주, 일본, 유럽 등으로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댁 식구들과의 영적 대립은 더욱 강해질 뿐이었다.

  결혼 한지 3년쯤 되었을 때, 나는 이 방법은 안되겠다 생각하고 시어머니와 남편의 구원을 놓고 작정철야기도에 들어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1년이 다되어가도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1년이 되는 날, 남편이 회사에서 희사 받은 자동차의 세금을 내기 위해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야했는데, 그 일을 나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시어머니와 남편, 둘만 알고 처리했다.

  나는 그날 저녁 남편에게 나쁜 일도 아닌데 왜 나에게 숨겼느냐고 처음으로 대들면서 싸움을 했고 한밤중까지도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어머님이 싸움을 말리려고 오셨고 남편은 술을 마시러 나가버렸다. 나는 어머님을 붙들고 “전 이 집안에서 인정도 못 받고 아무 쓸모도 없네요. 어머님, 저는 좋은 며느리가 못 되나 봐요.”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나는 이 집안에 들어온 후 잘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다 허사가 되었어요. 참고 인내하며 열심히 살면 가족들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지옥가지 않게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안타깝습니다.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저는 기독교인이기에 자살하면 큰 죄가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굶으면서 기도할 생각입니다. 그러다가 하늘나라로 가면 저는 비로소 행복해질 거예요.”라고 울면서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남매를 남겨두고 어떻게 간다는 소리를 하느냐고 말리셨지만 나는 계속 우기며 굶어죽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머님은 놀라셔서 “그럼 내가 교회에 나갈 테니 그만 울어라. 이번 주일에 꼭 갈 테니 제발 그만 울거라.” 하셨고 나는 어머님의 다짐의 대답을 듣고 눈물을 그쳤다. 그동안 작정기도 해온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어머님은 돌아오는 주일부터 교회에 출석을 하셨다. 출석하신지 1년쯤 지났을 때 성령의 체험을 하신 후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깨달으셨다. 그 뒤로는 외아들의 구원을 놓고 기도에 들어가셨다. 나는 한 날을 작정하여 어머님께 했던 대로 남편에게 금식하며 죽을 것이라고 호소하는 방법을 썼는데 먹히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남편 앞에서는 눈물도 안 나왔고, 남편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죽으라고 하며 무시해버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내성적인 성격의 남편

  계속해오던 사업이 만 6년이 되었을 때, 집안에서는 여자가 돈을 너무 많이 벌면 남편의 기가 꺾인다고 집안일에 전념할 것을 권유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에게 사업을 맡겼으나, 남편은 내가 6년 동안 키워온 사업을 3년 만에 부도를 내고 말았다. 결국 내가 나서서 수습을 해야 했다.
  의류 사업을 정리하고 1988년도에 내수 사업으로 전환을 하였으나 이번에는 영업팀의 잘못으로 또다시 부도를 맞았다. 부채정리를 모두 마치고 나니 손에 든 거 하나 없이 길바닥에 내앉는 신세가 되었다. 갈 곳이 없는 상태여서 하는 수 없이 작은 집을 한 채 사주었던 시 고모의 아들에게 사정하여 그곳에 월세로 들어갔다.

  남편은 5개 국어를 할 정도로 능력도 많았고 인물도 좋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모든 것을 술로 달래는 타입이었다. 그동안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고 있었는데 부도로 인한 충격 때문이었는지 남편이 갑자기 쓰러지고 말았다. 병명은 ‘알코올성 유사간질’이었다. 우리는 정신과를 찾아가 상담도 받고 약물치료도 해보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운전을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운전대를 놓아 사고를 내기도 했는데 다행이 큰 사고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본인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었다.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기에 남편의 몸은 자연히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나이도 있기에 실력이 있더라도 재취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1992년에 어느 회사의 제의를 받고 상해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남편은 무조건 가겠다고 우겼지만 나는 “지난 18년 동안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격지 않았느냐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절대 못나간다.”고 사정을 했다.

  남편은 술을 끊고 싶어도 중독이 되었으니 자신의 의지대로 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러한 현실을 피해 도망치듯 상해로 나가고 싶어 했으나 나와 가족을 생각해 갈등에 빠졌다. 그날은 상해로 떠나기 40일 전이었다.


남편이 먼저 천국으로

  남편은 낮에 술을 사러 가다가 무심코 북한산 쪽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커다란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남편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놀라운 일이라서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그 십자가는 남편을 향해 빛을 비추며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술을 사러가던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그 사실을 몰랐던 나는 남편에게 정말 상해에 가고 싶으면 예수님을 믿고 가라고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을 했는데 남편은 그제야 낮에 십자가를 보았던 일을 이야기하며 예수님을 믿겠다고 했다. 그 뒤로는 정말 교회를 나갔고 술도 딱 끊었다. 새벽기도도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에 40일이 되어 상해로 나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잠을 자던 중에 심장에 마비가 와서 하늘나라로 먼저 갔다.

  남들은 객사를 했다며 말이 많았지만 나는 오히려 남편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구원받고 천국에 갔으리라는 확신에 감사했다. 아직도 갚지 못한 부채가 1억 원이나 남아 있었기에 사람들은 나를 보고 불쌍한 젊은 과부라고 했지만 나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다.
 
병원 선교

  그 후로 부채도 모두 갚고 이제는 허리를 펴려나 할 때 뜻하지 않던 병이 찾아왔다. 작년 3월말,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아서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증세가 나아지진 않고 계속 안 좋아 2일을 더 안정을 취했지만 3일째 되는 날은 몸에 마비가 오고 언어 장애증상이 나타났다. 바로 입원을 했으나 이미 반신불수가 된 상태였다.

  병명은 뇌경색이었다. 문병 온 사람들은 나의 모습을 보며 울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곧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의 배짱이 솟아올랐다. 그래서 “한 달 후면 나간다. 그러니 울지들 말아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호강을 해보겠느냐.”며 오히려 씩씩했고 내 입으로 시인 한 것처럼 되길 간절히 기도하며 매일 운동도 열심히 하였다. 병 때문이긴 했지만 정말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이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1개월 후에 믿고 장담하던 대로 거의 완치가 되어 퇴원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완쾌된 것은 아니라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해야 했다.

  쓰러지기 며칠 전, 예전에 우리 사업체에 몇 십억의 빚을 지고 부도를 냈던 거래처 사장의 부인을 우연히 만났는데 보험설계사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분에게 서로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이제 지난일은 다 잊고 힘내자며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작은 액수의 보험을 하나 들어주었다. 그런데 내가 쓰러지고 난 후 그 보험의 적용을 받아서 병원비를 치르고도 많은 액수의 돈이 남았다. 게다가 나는 재활치료가 필요치 않을 만큼 건강해졌기 때문에 남은 보험금을 병원선교비 명목으로 정해놓고 개인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사한 마음에 선교를 목적으로 작은 것이지만 혈압에 좋다는 오이를 사서 매일 병실을 찾았고 환자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위로했다. 그들은 모두 돈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신체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에 폐인이 된 것 같은 심정으로 몹시 괴로워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사들고 가는 오이는 사랑을 가지고 가는 거였고 그들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어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

  나는 항상 환자들에게 “낙심하고 절망할 것 없어요. 마음의 평안이 최고의 약이에요. 그러나 그 평안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질 때 얻어지는 거에요. 나도 같은 병을 앓았지만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치료해 주셨어요. 한마디로 우리는 중풍이 아닙니까? 이 병은 완치되는 확률이 아주 희박하죠.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 고치시면 나처럼 빨리 고침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권면하였고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더 가볍고 큰 기쁨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병원 선교를 하면서 지나간 인생의 굴곡들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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