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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어둠의 터널을 지나 진리의 예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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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터널을 지나 진리의 예수님께로
   
- 김용식 강도사 (남, 43세, 예수사랑교회, 경기도 성남시) -


불행한 어린 시절

  5살 때 어머니를 여읜 나는 6살에 새어머니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친어머니의 기억이 남아있어서 새어머니에게 어머니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새어머니는 그런 나를 이해해주고 감싸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갖은 구박과 학대를 하였다. 그럴수록 어머니란 말은 더더욱 나오지 않았다.

  천주교인이셨던 새어머니는 늘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지니고 다니셨는데 하루는 그 목걸이가 방바닥에 떨어져있는 것을 보게되었다. 야광으로 된 것이었기에 신기하기도 하고 좋아 보여 목에 걸어봤는데, 그 광경을 본 새어머니는 너 같은 것이 왜 그것을 만지느냐며 연탄집게로 온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구타를 가하셨다. 그 후로도 연탄집게로 많이 찔리고 맞아서 연탄집게를 보면 ‘날 때리는 도구'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는 읍내의 면장으로 계시면서 주말에만 집에 오셨다가 가시기에 나의 고통을 모르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집에 오실 때만 밥상에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학교 갔다 오면 부뚜막에 내놓은 밥을 반찬도 없이 부엌에서 쪼그리고 앉아 먹곤 했는데 이상하게 밥을 먹고 나면 속이 울렁거리고 자주 토하였다.

  초등학교 4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부뚜막에 쪼그리고 앉아 허기를 달래고 있었는데 옆집의 형이 내 밥을 보고는 “야 임마! 너 이거 쉰밥이잖아"라고 했고 그때야 나는 새어머니의 나쁜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새어머니는 날마다 나에게 쉰밥을 먹으라고 내 놓았던 것이고 나는 여태껏 그것이 쉰밥인지도 모르고 허기를 채우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세월은 흘러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오래도록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학교에 가면 선생님께 혼날 것이 두려워 결석을 했다. 그러자 학교에서는 사람을 보냈고, 새어머니는 나에게 ‘너 학교 가기 싫지?'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새어머니가 윽박지르는 것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대답했고 새어머니는 그 길로 자퇴 원서를 내고 왔다. 그리고 주말에 아버지가 오셨을 때는 자기가 아무리 타일러도 막무가내로 싫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자퇴 원서를 냈다며 내가 뻔히 보고있는 눈앞에서 거짓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지냈던 가출생활 

  나는 그때 ‘내가 여기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하루빨리 새어머니한테서 벗어나는 길만이 내가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희망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돈 1300원을 가지고 집을 나와 무조건 차를 타고 상경하였다. 그러나 막상 서울에 도착하자 당장 먹고 잠 잘 곳이 없어 일주일을 굶었고 밤에는 볏단을 덮고 잠을 잤다. 고생이 말이 아니었지만 나를 학대하던 새어머니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맘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고생하며 생활하고 있을 때 나에게 다가온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미 가출한지 오래되어 남의 돈을 빼앗아 생활하고 있는 불량한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고 나 또한 그 생활로 접어들었다.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고 반문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새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손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위안을 삼았다.
  내 성격은 날마다 괴팍해져갔다. 친구와 싸우다가 내가 더 맞기라도 하면 분해서 잠을 못 이뤘고 어떻게 해서든지 복수를 하고야 말았다. 내 속에 숨어있던 악마적인 기질에 나조차도 내 행위에 스스로 놀라곤 했다. 가출 1년쯤 되었을 때 소년원에 잡혀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죄질에 상관없이 가정에 연락해 복귀를 시켰다. 그러나 전화를 받은 새어머니는 아버지께 알리지도 않았고 나를 데리러오지도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또다시 방황을 하였고 가출생활 10년 동안 뒷골목을 전전하였다. 꿈을 키우고 아름다워야 할 10대와 20대를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방황하였고 마음의 아픈 상처와 더불어 교도소의 별만 자꾸 늘어갔다.

세상에 대한 분노

  출소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1984년, 많은 사람들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는데 나는 다른 범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번의 전과경력이 이유가 되어 사회정화 대상 1호로 리스트에 올라 새벽 2시에 군부대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4주만 교육을 받으면 나갈 수 있다고 하여 정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도 잘 참았는데 4주 후에는 다시 근로 봉사대에 보내졌다.
  하루는 너무나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쳐먹으려고 한밤중에 여러 명이 잠시 숙소를 이탈했는데 초소를 지키던 사람들은 우리가 도망하는 줄 알고 총을 쏘았다. 그리고 우리는 잡혀서 군법정에 넘겨졌다. 그러나 우리가 도망치려던 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군의 실수로 총을 쏘았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의 과거를 조사해서 갖은 죄목을 씌웠다.

  그렇게 해서 12년의 형을 선고받고 청송보호감호소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나는 그때 이 세상에 대해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분노를 품었다.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는 굴욕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고, 결국은 교도소에서 폭발하여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나는 독방신세가 되었다.
  6개월 후 소장님의 특별배려로 목사님과 집사님들이 면회실로 들어오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옛날에 새어머니의 묵주를 만졌다가 죽을 정도로 맞았던 기억 때문에 십자가, 성경책, 찬송이라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여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하였다. 그런 나를 위해 예배를 드리러 왔다니 나는 그런 것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나는 독방에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그 분들은 예배를 시작했는데 내가 철조각으로 벽과 철장을 심하게 긁어대며 예배를 방해했기 때문에 더 이상 예배를 계속 드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맑은 눈망울 

  이틀이 지난 후 그 목사님께서 다시 오셔서 나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시도하셨지만 난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목사님께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어 돌아가시려고 했을 때 어린 소녀가 식기통 입구로 “아저씨, 이거 꼭 읽어보세요." 하며 성경책을 내밀었다. 그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붓던 것을 그쳤고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 그 성경책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모두들 떠나고 나서도 날 바라보던 그 어린 소녀의 맑은 눈망울이 자꾸 떠올라 던져 놓았던 성경책을 살짝 펼쳐보게 되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

  그러나 난생처음 읽어본 성경은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하기만 했고 결국 그냥 책을 덮어버려 나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벽돌 한 장 크기 만한 창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이 내가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세상의 전부였고 그런 독방생활에 나는 차츰 지쳐갔다.
  그래서 자살을 결심했다. 속옷을 찢어서 가늘게 끈을 꼬아 고리를 만들어 벽에 걸고 디디고 있던 이불을 밀쳐냈다. 순간 온 세상이 노랗게 보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와 누구 없냐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쳤다.
  그때 어떤 맘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아니 어떤 말로도 표현 못할 것 같은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아! 나를 따르라! 아들아! 나를 따르라!" 하고 두 번 이나 들렸고 나는 곧 깨어났다. 내가 깨어나자 교도관들은 혼수상태로 사흘이 지났다며 살아난 것이 기적이라고 했고 살아난 것 뿐 아니라 내가 발견된 일 또한 기적이라고 했다.
  당시 청송교도소는 소장이 독방을 순찰하는 일이 없었는데 소장이 새로 부임하면서 독방을 순찰하게 되었고 그 때 목을 매고 축 늘어져있던 나를 발견하여 살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깨어난 뒤에도 인자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그래서 한 교도관에게 그 목소리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교도관이 ‘그 분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형제를 사랑하셔서 위독한 마지막에 잡아주셨으니 꼭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다.
  회복이 되어 다시 독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성경책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저게 뭔데 그래'라는 궁금증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성경책을 펼쳐보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끝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성경을 펴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8장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구절을 읽는 중에 ‘자유'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고 순간 내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마구 뛰었다. ‘내가 감옥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자유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여기 성경에 진리를 알면 자유롭게 된다고 했으니 진리를 알아야겠구나'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었고 예수님이 그 진리임을 알게되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자유해지겠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3시간 동안 눈물을 쏟으며 통곡을 했다.


진리의 예수님께로 

  그 3시간동안 나는 예수님을 만나 지나온 과거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여 용서받았고, 죄에서 풀려나 영혼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내가 죄악 속에서 방황하던 그 오랜 시간을 참아주시고 붙들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자 내 마음의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다 씻어주시고 어루만지시며 위로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비록 예전과 똑같은 손바닥만한 창 하나를 통해 내다보는 세상이 전부인 갑갑한 감옥 생활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의 영혼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뒤로 계속해서 성경을 읽었다. 내가 별다른 사고 없이 꾸준하고 착실하게 성경을 읽고 있으니 나에 대한 평가는 점점 좋아졌다.
  나는 신앙생활을 더 잘하고 싶어서 교무과장에게 종교사동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 곳에 있는 믿음의 지체들과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감자들이 ‘저 자식은 안돼'라고 하며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들이 그럴수록 주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 변화된 모습으로 더욱 낮아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더니 결국 나의 변화된 모습이 인정되어 신앙 공동체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2년 동안 봉사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일을 하라는 사명을 깨달았다. 그래서 열심히 훈련받으며 검정고시로 중등과정과 고등과정을 마쳤고 상당히 많은 분량의 신학서적을 읽었다.
  출소한 후에 아는 분의 후원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교정사역을 시작하였다. 나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한번은 더 많이 섬기고 싶은 마음에 치킨 집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잃고 나서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달았다.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인데도 불구하고 돈을 벌어 물질로도 섬기려고 인간적인 욕심을 부렸던 것이다. 지금은 협동으로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


푯대를 향하여

  최근에 동역자와의 불화로 큰 시험이 있어서 그 문제로 기도원에 금식기도를 하려고 올라갔다. 그 동역자와 꼭 헤어져야만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맘껏 사역을 펼칠 수 있기를, 맘이 괴로운 가운데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먼저 너를 원하노라. 네 마음 전부를 나에게 향하고 의지하라. 그와의 일은 나에게 맡기라. 머지않아 네가 원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맡기리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이 고난을 통하여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확인시켜주셨고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셨다.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대로 그 일들이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기대하며 기다릴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3∼14절의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처럼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라며 믿음의 경주를 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 출처 : 강남금식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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