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간증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다

첨부 1


- 간증 : 전명순 권사 (여, 49세, 중랑구 망우동)

어린시절 은혜를 체험하고

  외가 쪽으로 3대째 신앙을 가진 우리 가족은 계룡산 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었는데, 그 마을에서는 우리 가정만 예수님을 믿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앓았었는데, 뜨거운 신앙을 가지신 할머니는 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가는 것은 이해하셨지만 주일날 교회에 안 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셔서 내 종아리를 때려서라도 교회에 보내셨다.

  당시 우리 아랫집에 살던 무당은 시름시름 앓기만 하는 나를 낫게 할 수 있으니 자기에게 무당으로 팔라고 하며 어머니와 할머니를 설득하였다. 그러나 어른들은 ‘끝까지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명이 다하여 죽으면 천국에 가는데, 왜 지옥에 가는 길을 선택하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그 무당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살 때 교회의 전교인 수련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를 받고 다섯 개 국어의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 때에 온몸이 시원해지며 병이 씻은 듯 낫게 되었다. 또한 병으로 인해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없던 성격이 적극적으로 바뀌게 되어 그 후에는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교사로 봉사하며 청년회 활동을 하는 등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였고, 이십 리 밖으로 나가서 전도도 하여 많은 열매를 보기도 하였다.

  그런 나에게 목사님과 사모님은 목사사모가 되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시골교회에서의 넉넉지 못한 목사님들을 보아왔던 나로서는 사모가 된다는 것이 고되게 느껴져 너무 싫었고, 부자청년을 만나 결혼하고 싶었다.

사기결혼 

  그러다가 결혼적령기가 되어 나는 어머니와 절친한 사람의 중매로 한 사람을 소개받고 결혼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결혼상대자는 자신이 교회에 등록되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말하며 우리 가족을 그의 교회로 초대하여 대접까지 해주었기에 집안 어른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을 한 후 그 모든 것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 직후 남편은 내가 교회 나가는 것을 금지시키며 자신은 교회에 나간다고 말한 것과 우리 가족을 교회로 초대한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더구나 시어머니의 오빠는 작두 타는 큰무당이고, 시어머니는 작은 무당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혔다. 나에 대한 남편과 시댁의 핍박은 극심하였고, 그러다 보니 나는 노이로제에 걸려 급기야는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첫 딸은 무사히 낳았으나, 그 후에는 신경성으로 인해 3번이나 자연유산을 하면서 탈진상태가 되어 나의 몸과 마음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5년 후에 겨우 아들을 낳았지만 기쁨은 잠시였고 날마다 계속되는 남편의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남편이 나에게 난동을 부리는 모습을 본, 예수 믿는 큰 형님의 도움으로 나는 남편을 피해 집을 뛰쳐나왔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탔지만 새벽 2시인 그 시각에 어디로 가야할지 갈 곳이 없어 너무 무서웠다. 순간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라는 책에서 최자실 목사님이 삼각산에 갔었다는 것이 떠올라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택시기사에게 삼각산으로 가자고 했다.

  막상 삼각산 기도원 앞에 내리긴 했지만 가진 돈이 없는 상태였기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바위 밑에 들어가 금식하다가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기도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21일 금식기도를 작정하였다.
  금식 열흘째 되던 날에 산에 올라가서 성경을 보며 앉아있을 때, 내가 성만찬 잔을 들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 그 잔 속에는 하늘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담겼는데, 그 피로 잔이 다 채워진 후 그것을 마시라는 음성이 들리기에 그 잔을 다 마시고 나니 새 힘과 기쁨이 솟아올랐다. 그 후에는 밤마다 산에 올라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충만히 받았고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을 용서하게 되었다. 그리고 21일 금식을 마치고 난 후에는 하루가 다르게 치료되어 급속히 건강해졌다.

자녀들을 찾겠다는 일념

  그렇게 3개월이 지난 후에 나는 아이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큰형님께 연락을 하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제까지 받았던 핍박보다 더 심한 핍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얼마 후 나는 이혼을 당했다. 내 처지가 이렇게까지 되자 나는 3대째 예수를 믿으며 신앙을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가룟 유다처럼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차라리 마음 편하게 돈벌어서 아이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식당을 시작하여 밤잠도 자지 않고 무조건 일하였다. 그동안 내 몸은 차츰 병들어 갔지만 오로지 아이들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돈의 노예가 되어 이를 악물고 일하였고, 그 사이 돈은 거짓말처럼 불어나 쌓였다.

  그렇게 8년 동안 지내는 가운데 내 병은 중하여졌는데, 몸밖으로 병의 뿌리가 뻗쳐져 피부로 보일 정도였다. 병명은 위암말기. 이미 이전에 죽었을 목숨이 그때까지 숨쉬며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아이들을 보기 위한 집념 때문이었다. 그동안 벌어두었던 돈은 치료비로 날개 돋친 듯 날아가 버렸다. 그 때가 바로 1996년 여름이었다.

가슴을 찢는 회개

  그 무렵 예전에 삼각산에서 만났던 분과 연락이 닿아 그 분에게서 강남금식기도원을 소개받았다. 기도원에 가기로 결정을 하고 버스에 오르던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르며 ‘7일만 금식하면 살려주실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막상 기도원에 도착하여 성전에 앉아 있자니 내 모습에 자존심이 상하여 기도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금식 7일째 되던 날, 내 가슴속에 독버섯 같은 혹 4개가 자라고 있는 환상을 본 후에야 냉랭하던 가슴이 열리며 19살 때 소명주신 것을 저버렸던 것과 8년 동안 예수님을 저버리고 산 것을 회개하게 되었고 ‘가룟 유다보다 더 나쁜 죄인이구나!’라고 깨달아지며 가슴을 찢는 회개가 터졌다.

  그리고 정식으로 21일 금식을 해야겠다는 감동이 와서 순종하였는데, 그 후 매 예배시간에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내 온몸 구석구석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때마다 내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목욕탕에 가서 배를 보니 피부에 까맣게 돋아있던 암 뿌리가 녹아 없어졌고 그 자리에 빨간 꽃이 피어 있었다. 바로 암 병이 고침받은 흔적이었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것이다. 할렐루야!

  그 후 2개월 동안 철저히 회개하며 요양하던 중에 어느 날 내가 머리를 감고 있는데 검은 물이 열 대야도 넘게 나오기에 계속 헹구어 내어 결국에는 맑은 물로 바뀌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하도 이상하여 지금은 외국에 계신 목사님께 상담을 해보니 목사님은 신학교를 가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 후에도 나는 생계문제로 식당을 계속 운영하였는데, 나중에는 식당을 통해 날마다 전도의 열매를 얻게 되어 식당경영은 나의 부업이 되었고 결국엔 신학공부를 시작하여 지금은 졸업반이 되었다. 내가 신학을 시작하자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다 내게로 돌려보내시고 나에게 역사하신 대로 모두를 구원해 주셨다.

  나는 현재 간증사역을 다니고 있는데, 그 사역을 잘 감당하기 위한 21일 감사 금식기도를 은혜 가운데 잘 마치면서 감사한 마음에 내가 만난 하나님을 증거한다.
내가 살아가는 순간마다 개입하셔서 인도하시고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린다.

- 출처 : 강남금식기도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