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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내가 만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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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한두홍 성도(부산영락교회 장림1구역)

      이 "글" 이 있기까지 이 무지한 저를 악에 구렁텅이 속에서 건져 주시고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이 보잘것없고 악으로  가득 찬 저를 죄 사함으로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먼저 이 글을 올립니다.

여러 형제. 자매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2남 4녀중 차남으로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줄 곳 부산에서만 생활해 오면서 어릴 때부터 가끔씩 영락교회 앞을 지나가기 때문에 부산에 큰 교회가 여기에 있다는 정도로만 알았지(그 당시 "야~ 교회가 참 웅장하다"~하고 혼자 속으로 생각함)제가 교인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 집안은 불교였으며 또 다른 바다의 용왕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부모님의 고향이 바다를 끼고 있어 작은 일만 생겨도 바다에 가서 바다 왕께 굿을 하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며 자식들을 잘되게 해달라며 "등"을 달고 빌며 오랜 세월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보고 "예수쟁이~!" "예수쟁이~!"하면서 비판과 모진 말들을 하는 등 교인,교회, 기독교라는 단어는 저와 전혀 관계가 없는 집안이였습니다. 저의 아내는 천주교 이며 세례명도 있지만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 집안에 시집을와 발을끊고 살아간지 오래지만 지금은 저희 가족 모두가 주님을 믿으며 주님의 사랑안에서 감사하며 하루하루 를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 영락교회에 다닌지 현재 4~5개월 밖에 안 된 갓난아기와 같은 성도 입니다.

제가 "기독교"란 종교를 믿기 까지는  51년이란 수많은 세월과 적지않은 고통과 역경 그 자체 였습니다. 여러분들 께서도 아시겠지만 6.25 사변 휴전 직후라 전국민이 다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할때 입니다.

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저는 큰 불행을 겪었습니다. 저희집은 작은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해 여름 저희식당 길 건너편에 "철공소"란 공장이 있었는데, 제가 그 공장 앞에서 동네 친구들과 놀고 있던중  그 공장에서 근무하시는 기술자 한 분이 저를 부르시더니 냉수 한사발 가져 오라며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저는 냉큼 식당으로 달려가 시원한 냉수를 가져와 드렸더니 "시원하다~~"하시며 벌컥벌컥 드시더니 빈그릇을 기계위에 두고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빈그릇을 찾아 갈려고 공장앞에 서성 이다가 제눈에 매우 신기하게 돌아가면서 백열등 불빚에 반짝이는 톱니 바퀴를 보았습니다.너무 신기하고 불빛이 예뻐 보였던 저는 왼손으로 기계를 만지던 순간  왼손은 이미 기계속으로 빨려 간 후였습니다. 그래서 손가락을 절단 해야 했고 그후로는 키도 잘 자라지 못하고 손을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습니다.

비록 장애인은 되었지만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여 남들보다  더 일찍 출근하고 남들보다 더늦게 퇴근하면서 전문 서적과 전문교육기관을 통해서 프레스 금형 제작기술 등을 공부하고 실습하며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습니다. 

"프레스 금형을 개발,설계,제작연구"하며 밤낮 없이 열심히 피땀 흘려 일하는게 저의 일상이자 취미생활이 된 지 25년이 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제 나이 26세 되던 해 그해도 매섭게 바람이 불고 춥던 동지섯달에 저희 첫째 딸이 태어난지 삼일 만에 죽음으로 저희 부부는 육체적.정신적 고통과 갈등 속에서 살아 왔으며, 저의 두번째 불행 이었습니다.

시련을 견디고 그후,1년후 지금 서울에 가 있는 큰딸이 태어났고, 시간이 지나 3년후 막내딸이 태어났습니다. 예쁘게 잘 자라던 막내딸이 생후 7~9개월때쯤 이불자리에 똑바로 눕혀 놓으면 자꾸 돌아 누워 한쪽 방향으로만 잠을 잠으로서 한쪽 얼굴에 안면 마비 현상이 생긴 줄 저희들(아내와 저는)은 모르고 있다가 생후 1년 2개월쯤 친 할머니께서 막내손녀를 보시다가  낮선 할머니 손에서 엄마를 찾으며 울고 있던 막내 딸을보고 한쪽으로만 볼이 돌아간다고 말씀 하시기에  얼굴을 보니 정말로 한쪽 얼굴에 마비 증세가 있어 병원에 가본결과 이미 신경이 굳고, 아기가 너무 어려 치료가 안된다고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하늘이 무너지고,땅이 꺼지는것같은 큰 고통을 마음에 묻어둔 채 하루 하루를 살아야 했습니다.그후 한방으로 침을 맞히고 약을 먹이며 큰 병원 작은 병원 한방에서 알아준다는 의원까지 찾아다니며 치료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지병을 앓게 된 막내딸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듯 아파 오지만 험한 세상 남들의 시선과 사회의 핍박에도 꿋꿋이 잘 견디며 예쁘게 커준 막내딸이 대견하기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죄악의 나날 가운데 1992년 프레스 기계 한 대로 자동차 부품 제조업을 창업하고 대표이사가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가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평균 16~20시간 가량을 기름과 땀으로 범벅하며 열심히 노력하고 일한 가운데 200통 짜리 파워자동 프레스 기계설비와 N-C피-다기라는 코일로된 철 원자재를 자동으로 작동하게 하는 기계설비와 8대의 일반 파워프레스 기계,금형제작하는 공작기계,부품을 서로 붙이는 스포트 용접기외 다수 기계 설비를 보유하면서 2002년8월 구평 농장에서 현 주소지인 장림동으로 확장이전 하여 큰 포부와 꿈과 희망을 안고 새로운 자동차 모델을 개발하고 생산 하던중,저와 가족들의 불행은 이어졌습니다 ."2003년5월8일"(음력 4월8일부천님 오신 날) 이날은 저희 가족들을 영영 잊을수 없게  만든 불행과 고통의 날이었습니다. 대형 안전사고가 난 날이 었습니다

공휴일인데도 불구하고 사장님의 사전승인도 없이 전 직원을 다 출근시켰던 터라 아랫사람을 (대리)호통 치던 중 오전근무만 하고 퇴근시킨다기에 그럼 이왕 온거 할 수 없으니 오전만 일하고 퇴근을 하라 이른 뒤 그날따라 기계작동 스위치와 안전 장치 등을 제가 직접 점검 하면서 더욱 철저히 안전교육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생산관리자 한명이 12시 20분경 안전장치를 풀고 장갑을 끼고 보조공구(핀셋과 꽁치벤치)를 사용하지 않은 채 양손으로 작업을 하다 "양손모두 "압착되는 절단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쌍용 자동차" 로디우스"  라는 신형차 부품개발 준비에 밤낮으로 정신을 몰두 하던 터라 근교에 있던 친구 공장에서 금형설계를 하던 중이였고 아내는 근처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고 절 밥을 먹고 있던 중에 공장에서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친구와 같이 병원으로 달려가 상황을 수습하고 난 뒤 공장으로 돌아오면서 부터 일이 하나 둘씩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금형 설계가 사고 전에는 정상적으로 진행이 되었는데 사고 후 내 자신도 모르게 이상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어 제작후 부품생산 시험때 앞뒤가 맞지 않아 당황스러웠습니다.
제 경험과 노하우로 따져볼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신차 출고 날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온몸은 파김치에 발바닥은 실험일정으로 씻지도 못하고 바람통풍을 못하다보니 발옆면  전체가 악성 무좀에 걸려 진물과 피고름이 나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내 몸과 정신은 멍하니 따로 따로 놀고 있었습니다.

정말 반기고 싶지도 반가워하고 싶지 않은 불행은 계속 되었고 평소 막내딸은 성격이 털털하고 남자다워 기계생산과 금형셋팅 보조도 해 주면서 공장에 들릴 때면 아빠 엄마의 일을 잘 도와주곤 했습니다. 아빠가 너무 힘들어하시니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어 드려야지 하며 200톤 기계에서 보조 작업을 하던 중에 1톤 이상 무게가 나가는 금형상판이 막내의 양팔에 떨어져 근육 파열로 2개월 이상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마음을 굳게 먹고 이를 깨물며 내가 이래선 안 되지 하면서 새 각오를 다지면서 2003년11월초 모든 개발, 시험을 깨끗이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 후 2004년 2월 세계시장 경재원리에 맞춘다며 철강 원자재 가격이 매달 10%씩 인상되면서 공장의 이익금도 마이너스로 떨어지면서 적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주 거래처 자재비 인상으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어 부품 단가 인상을 요청 하였으나 인상 폭이 미비하여 보유 하고 있던 부품과 금형을 모두 반납하고 새로운 거래처 확보를 하기 전까지 아무 일도 못한 채 공장을 지키던 중 서울에 있던 큰 딸이 모든 소식을 듣고 극심한 스트레스에 몸이 풍선처럼 붓고 눈 시력이 저하되어 인공 각막을 착용하고 말문이 막혀 전화통화에 말을 못해 듣기만하고 대답을 손가락으로 툭툭치며 소리를 내는 듯 하면서 통화를 했고 우여곡절 끝에 열차 편으로 부산역에 도착 후 공장으로와 공장 대문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한참을 기도드리면서 큰 딸은 그렇게 강한 긍지와 믿음으로 저희들을 이끌었습니다.

말문이 막혔던 큰딸의 말문이 터져 기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사탄과 마귀들은 썩 물러갈찌어다"하며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 후 몇 일이지나 저녁쯤 밖에만 나가면 갑자기 오른쪽 눈썹 옆에서 노란 광체의 빚이 발산됨을 느끼며 의아해 하며 딸에게 말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아빠~내가 며칠째 계속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아빠를 부른 신다. 아빠를 찾고 있다"며 말을 하기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 후에도 이런 현상은 계속 되었고 큰 딸이 “교회에 같이 나가자” 라고 말을 하여 집에서 가까운 남부민 중앙교회에 2주정도 출석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데 도통 아무런 느낌이나 반응은 없었습니다. 제 아내의 친구가 부산영락교회에 다닌다고 하여 아내의 친구에게 의논을 한 뒤 그분들의 도움으로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

2004년 9월 부산영락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릴 때 본당에 들어서는 순간 앞에서 흘러나오는 찬양대의 노랫소리에 귀가 열리고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면서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 갑자기 무언가 내 가슴속이 뻥 하고 뚫리며 자신도 모를 편안함을 느끼며 예배를 마쳤습니다. 저와 저희 일가족 모두 평안함으로 은혜를 받았고 저희를 안내해주신 집사님 가정과 그날 받은 은혜를 나누던 중 권사님께서 우리 식구의 손을 잡고 인도 하시어 새 가족 등록을 해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 후 저희 가족은 나름대로 열심히 1차, 2차 교육을 통해 기독교가 체험의 종교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호흡하며 행동하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공기와 같은 분이시며, 우리의 어떤 곳 이든 항상 함께 하시고 몸과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믿으면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속 깊이 계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확신하고 진실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희 가족은 마음의 평화와 온유함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아멘..이렇게 저희 가정은 주일예배와 수요 예배등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며 수요 예배때 찬양팀의 찬양에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음으로 다시 거듭나 저희 가정은 찬양의 소리로 하루하루 물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2004년 10월20일 수요일 오후 삼일 예배때 부르짖으며 목청 높여 울면서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현재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저희 공장이 수주한 물량이 없어 빈공장만 지키고 있사오니, 아랫동네에 있는 우리 공장 보다 규모는 작지만 실속 있고 매일 바쁘게 돌아가는 저 공장의 일이라고 조금만 갖다가 우선 공장세라도 보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간절한 통성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공장에 도착하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전날 기도 드렸던 아랫공장 사장이 바쁜 일이 있으니 일 좀 해 달라는 소식 이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응답"하여 주심에 기쁘고 놀란 맘에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아랫공장 사장과는 인사 한번 나눈 적 없었기에 더욱 주님께 감사하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정말 주님께서 내 사정을 봐 주시고 응답하여 주셨구나" 하면서 작은 일이지만 기쁘게 열심히 일한 결과 결재일도 한달이나 앞당겨 현금으로 지급해 주면서 당장 먹을 식량이 떨어진 저희 가족들의 끼니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일 감 과 사랑의 보살핌으로 저희 가족들 힘든 하루하루 이었지만 찬양과 가정예배로 아버지께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고 그때 받은 결제금에서 하늘 문을 여는 십일조 헌금을 아버지께 드림으로 더욱 감사하며 감사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 이로다.(시37:24) 할렐루야~
성탄절날 아기 예수님 탄생하신 날을 기뻐하며 새벽 촛불 예배 때도 참석하였고 몇 일이지나 그리고 새해가 되어 송구영신 예배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과 찬양을 드렸습니다. 새해가 밝은 날 처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서 보내는 첫 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기쁘고 뜻 깊게 한해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5년 1월2~5일까지 지리산에서 금식 기도회가 있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처음으로 마음을 굳건히 먹고 용기를 내어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루에 한 끼만 먹지 않아도 머리에서 쥐가 나고 온몸에 힘이 빠지며 하루에도 간식과 후식을 꼭 먹으며 밥 힘에 일을 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금식기도의 첫날은 그냥 힘이 조금 없더니 이틀째 되는 날은 다리가 더욱 풀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아무낙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겨우겨우 기도실에 올라가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나니 그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도실을 나왔고 그 후로도 저는 견딜 수 있었습니다. 5일 날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성찬식을 하고나니 "이~~야~~" 신기하게도 온몸에 힘이 나는 것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금식예배 때도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받음으로 내 삶에 있어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 잊지 못할 좋은 추억과 은혜로 충만한 시간들이 이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5~56)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대로 살지 못하고 악하고 게으르고 추악한 종을 주님께서는 이렇게도 수많은 사랑과 응답으로 저희를 품에 안아주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이 육신의 세상에서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제 마음속 깊숙히 좌정하시고 이끌어 주신 아버지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담임목사님의 높으신 말씀에 기독교인들이 "술" 은 적당히 마시면 괜찮다고 누가 성경에 써 있다고 했느냐며 꾸중하시고 성경 말씀에는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가끔씩 가족들과 화목해 하며 조금씩 마시던 술(포도주와 청하)도 딱 끊을 수 있었던 것은 결단코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3)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과 그 구원을 깨닫는 인간과의 간격을 좁히는 것은 성령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 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기도할 때 역사 하십니다. 감사든 탄식이든 우리가 기도할 때 성령님은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구원이 절실한 사람이 더 기도로 간구함으로 더 많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과 영혼의 양식 중에서..)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한 저희 가족들 이지만 저희는 주님의 사랑과 그 품안에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거듭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많은 시련과 고통 뒤에는 주님께서 주실 축복이 항상 따르리라는 것을 믿으며 ,이런 힘든 고통과 역경의 시련 끝에는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라는 큰 뜻이 있음을 믿고 고통과 시련을 주신 모든 일 에도 감사하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며 존귀하시고 거룩하신 주님께 오늘도 찬양과 경배를 올립니다. (출처 : 부산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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