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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어머니, 형님을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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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오형재 교수(서울시립대)

5년전 소천하신 어머님은 늘 우리에게 우리가족은 마치 야곱의 가족처럼 모두 무사하여 한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비록 어머님은 가셨지만 건강한 모습의 형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2000년 8월 15일 오후 5시는 나에게 감당하기 힘든 엄청난 감격을 안겨준 시간이었다. 1950년 16세에 헤어진 형님(오영재·북한계관시인)을 50년만에 서울에서 만나다니! 김포비행장에서 선두대열에 끼어 미소하며 복도에 모습을 나타낸 형님을 보고, 그리고 COEX에서 얼굴과 살을 맞대고 형님을 상봉했을 때, 나는 강렬하게 엄습해 오는 현실 앞에 쏟아지는 눈물을 가늠하지 못했다.

형님은 우리와 함께 5년전 돌아가신 어머님을 부르며 울었고, 상봉 마지막 날에는 “너희는 2,3일이면 평상업무로 복귀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그렇게 되기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고 했다. 말을 마치고 워커힐 정문을 떠나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그는 차창밖에 서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자 좁은 유리창에 얼굴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기약없이 떠났다.

형님을 보내고 난 나의 허전한 마음은 이내 고등학교 3학년 때의 1956년으로 돌아갔다. 가난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여유가 없어 할 수없이 ‘서울 유학의 길’을 사관학교 진학에서 찾았다. 그 당시 나는 신상카드의 가족란에 1950년 의용군에 간 형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조회과정에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통과됐다.

연좌제의 보이지 않는 사슬

그 후 나는 전방에서 관측장교로 근무하다가 육사교수 양성계획의 일환으로 AID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2년간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1964년부터 육사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2년 후 1966년 12월, 방첩대에서 나를 호출한다는 전갈이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온 가슴이 뛰었다. 의용군으로 간 형이 연고자를 찾아 남한에 잠입할 가능성이 있으니 제대를 하던가 아니면 방첩대에서 근무하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통첩이었다.

그 때 이후의 이야기는 길어 생략하거나와, 결론은 전역도 방첩대 근무도 아닌 육사교수로 남게 되었다. 그 당시 사령관인 윤필용 장군님께, 그리고 당시 방첩과장이셨던 노태우 전 대통령께 깊이 감사드린다. 그러나 그때부터 나는 연좌제의 보이지 않는 사슬에 얽매이게 됐다. 대위에서 소령으로는 동기생보다 6개월 늦게 진급됐고 소령에서는 그 이상의 진급이 정지됐다. 결국 소령을 8년 달고 계급정년으로 1978년에 전역하여 그 때부터 한달 후 지금의 서울시립대 교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대에 전남에 고향을 둔 학생들 중에는 연좌제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지 않은 자들이 드물 정도였다. 영화 ‘남부군’의 배경인 지리산이 바로 소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순 반란사건, 제주도 폭동 사건 등 연루의 개연성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광주고등학교 동문들에게도 위의 개연성은 예외가 아니었고, 두뇌가 좋은 동기들이 관공서에 혹은 기타 기관에 입사차 지원서를 제출하여도 신원조회로 인해 불이익을 받기가 십상이었다. 동기생모임에 가보면 ‘쌍시옷 발음’을 연발하는 자가 있는데 그들은 대개 연좌제 피해자들이다.

나는 이제 군경력을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하는가? 그때 문득 떠오르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것은 국민교육헌장에 나와 있는 구절 곧, ‘현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으라’였다. 신원조회의 발목에 잡힌 후부터는 당사자들을 일체 외국에 내보내주지 않아 외국유학의 기회는 포기해야 했다. 나는 1966년 12월 이후부터 이른바 블랙리스트에 올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기관에서는 분기별 동향보고서가 작성됐고, 가끔 집에서 전화받을 때면 아무 말없이 전화가 끊기기도 했다.

중령진급을 포기한 나는 1973년 한국 과학기술원(초창기는 한국 과학원) 제1기로 국방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05명의 대열에 합류, 미국에서 획득한 수학석사 이외에 1975년 산업공학석사 하나를 더 추가했다. 그리고 소령으로 계급정년을 채워 제대하기로 결심하고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준비로 틈틈이 시간을 내어 논문을 써 두었다.

군에서 국비로 교육을 받으면 수혜 기간의 2배를 군에서 더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박사학위 취득은 우선 제대 후에 추진하기로 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바로 현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 내 삶의 외적 표현이었다.

소령을 8년 달았으니 자동적으로 제대가 되는가 했는데 또 청천병력이 떨어졌다.

미국 2년, 과학원 2년이 각각 두 배로 계산되면 소령을 몇 년 더 달아야 하는데, 그러한 법은 없으므로 차라리 진급을 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우수자원(수석입학, 4년간 국비 장학생 등)을 군에서 내보냈다는 질책을 면하기 위한 실무자의 편의주의적 착상으로 보였다.

이제 중령을 달면 뭣하나? 몇 년 못 가서 중령연령정년에 걸려 제대할게 뻔한데. 앞이 캄캄하였다. 현재의 처지에 주어진 나의 약진의 발판은 무엇인가? 결론은 인사담당 관계관들에게 만나는 대로 탄원하는 일이었다. ‘계급정년으로 자동전역하는 법과, 수혜 기간의 두 배를 군에 복무해야 하는 법 모두가 동등한 비중의 법이라면 당사자의 권익을 존중해 주는 것이 법 논리가 아닌가’라며 호소했다. 이러한 호소를 ‘진급 안하기 운동’과 병행했고 나의 탄원은 수락되어 드디어 1978년 2월 소령으로 전역했다.

나에게 마음의 십자가이기도 했던 형님이었지만 나는 형님을 지난 반세기 동안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했을 뿐 추호도 원망해 본 일은 없다. 아니 형님이 50년 당시 의용군에 입대했기에 부친이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우리가정이 무사했는지도 모른다.

금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며 나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세어 본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의 찬송을 부르면서 말이다. 5년전 소천하신 어머님은 늘 우리에게 우리가족은 마치 야곱의 가족처럼 모두 무사하여 한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비록 어머님은 가셨지만 이렇게 건강한 모습의 형님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또한 나를 이렇게 되게 하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할 뿐이다. 교수가 되어 65세까지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도 결코 장군 못지 않은 보람된 삶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50년전 헤어진 형님이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제일 먼저 불렀다는 ‘따오기’ 노래를 8월 16일 저녁 마지막 만찬 때 조용히 불러드렸다. 나는 마음 속으로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를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하늘나라’로 번역했다. 저 천국에서 부모님을 포함, 우리 모두 다시 만나게 될 그 날을 대망하며 나는 조용히 2000년 감사절을 맞이할 것이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것을 늘 기도했던 오영재 시인, 오형재 교수의 어머니(곽앵순 여사)는 안타깝게도 5년 전 소천했다.

[늙지 마시라]

- 오영재 계관시인

늙지마시라
더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빛 한 오리 없이
내 백발 서둘러 온대도
어린 날의 그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으리니
어머니 찾아가는 통일의 그 길에선
가시밭에 피 흘려도 아프지 않으리

어머니여
더 늙질 마시라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서로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 출처 : 신앙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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