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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이제는 말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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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윤석규 장로(성진교회)

나는 1982년 10월 군에서 전역한 후 군과 관련된 2개의 회사에서 일하다 한 회사는 적성에는 맞았지만 경영진의 비리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스스로 나와 버렸고(내가 나온지 6개월후 그회사는 부도로 망함) 또 한 회사는 적성에는 맞지 않았으나 생계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하지만 일을 잘 못 하였는지 9개월만에 권고 사직 당하고 말았다.
이후 우리 가족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1984년 당시 20여만원의 연금으로는 생활비는 겨우 감당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 학비까지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희정: 고1, 정희: 중2, 소희: 초6)
그래서 집을 1000만원에 전세 놓아 사당시장 앞 7평짜리 가게를 700만원에 전세를얻고 300만원을 자본삼아 신발장사를 시작 하였다.

물론 생활은 7평중 3.5평은 가게로 꾸미고 부엌도 없는 3.5평에 가재도구와 싱크대까지 넣어 놓고 잠은 아들은 가게 안에서 혹은 옥상에 천막을 치고 자고 아내와 나 그리고 두딸은 머리와 발을 엇갈리게 누어 잘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리 가족은 누구 한사람 불평하고 누구를 원망하는 일이 없이 즐겁게 하루 하루를 지낼 수 있었슴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일은 철저하게 가게문을 닫고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불편하고 힘든 가운데서도 가정예배를 드렸고 적지만 연금과 이익금의 십일조는 완전하게 하나님께 드렸다.

또 교회의 각종 행사에는 빠지지 아니하고 참석하였으며 심지어 3박4일간의 전교우 수련회까지도 가게 문을 닫고 참석하였다.

그러나 어려움은 우리를 떠나지 않는듯 하였다.

한 때 아들(윤희정 집사 당시 고1)이 대학에 진학 할 수 없는 가정형편을 알고 학업을 소홀히 하여 고등학교 1학년 1학기에 반에서 55명중 53등을 하는 일도 있었고, 나와 아내는 장사 수완이 없다보니 신발가게는 자본만 모두 소진하고 더는 운영할 수없어 2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업친데 덮친격으로 집은 집을 담보로 보증을 서준 친척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경매처분되어 길바닥으로 쫒겨날 형편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들의 문제는 기도와 대화로 이를 잘 극복하고 1학년 2학기부터 분발하여 3학년 졸업할 때는 반에서 7등을 하였고 수능 시험에서 수학은 톱 구릅에 속할 수 있게되었으며
"대학에 가면 건축을 전공하여 하나님의 집을 설계하겠다"고 기도하면서 공부한대로 아주대 건축과에 합격하여 지금은 "좋은 하루"라는 건축설계사 사무소를 개업하기에 이르렀다.

또 집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전세금을 마련하여 생활하게 되었고 나는 상공부(현 산업자원부) 5급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공직생활을 다시 시작하여 상공부 산하 공기업에서 61세에 정년을 맞아 퇴직하게 되는 축복도 받았다.

뿐 만 아니라 아파트를 분양 받아 IMF를 당하여 다시 어려움에 처하는 듯 하였으나 당시의 엄청난 고금리 속에서도 중도금을 12%이하의 융자금으로 처리 할 수 있었고 잔금은 1999년 정년 퇴직하면서 퇴직금을 받아 납부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내 생활을 간섭하시고 언제나 더 좋은 길로 인도 하셨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일을 하신다는 확신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였고, 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서 부터 내 소득의 열중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린 증거임을 확신하는바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만방에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리소서 (시67:1-2)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 하리로다 (시67:7)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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