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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가시나무 속에서도 장미꽃은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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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선잠이 들었을 때 어머니와 이모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용호 다리가 저래 걱정이다. 밥벌이나 하면서 살 지 모르겠다. 차라리 소아마비 걸렸을 때 죽었으면 나았을 텐데."
자신을 걱정했던 그 말은 그의 가슴을 후벼 파습니다. '
차라리…죽었으면…나았을 것을…'이란 소리는 비수가 되어 수십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찔러 댔습니다.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허리 아래 양쪽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1급 중증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학교서나 집에서나 두 쪽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습니다.
이웃동네 가면 아이들이 그에게 돌팔매질하며 비웃었습니다.
'세상에 짐이 되는 인생 아닌가'라는 좌절감과 '공부해서 뭐해'라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살던 그에게 중학생 시절 희망이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친구가 와서 '독일엔 아주 훌륭한 장애인 과학자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한번 진짜 과학자가 돼 후배 장애학생들에게 진짜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뛰어난 시험성적에도 '취학 불능 불합격' 판정을 받았지만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연세대 이공계 최초의 장애인 학생으로 물리학과를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으로 대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쉽지않았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이 나라에선 죽어도 안 산다'며 미국 와이오밍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며 전동휠체어를 탄 공학도를 보았습니다.
그를 보고 전자 공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장애인의 서러움을 이기려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학위를 마치고 '그래도 모국에서 사람대접 한번 받고 싶다'며 대덕연구단지의 한 연구원으로 취업을 하였습니다.
"서서 강의할 수 있느냐"는 의구심을 떨치고 배재대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이 54세에 공과대학장으로 뽑혔습니다.
문득 정신을 가다듬으니 자기 같은 장애인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청소년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배제대학교 공과대학장이 된 김용호 교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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