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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첫선의 선물 ‘놀라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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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박남규 목사 (중앙대 전자공학과, 총신대 대학원, 한국교역자호스피스협의회 회장 역임, 사랑의교회 목사)
 
1. 암 투병 할머니 한맺힌 고백 아직도 맴맴

‘가정의 달’ 5월만 되면 나는 먼 하늘을 올려보며 한 얼굴을 떠올린다.북에서 넘어온 박할머니.한평생 딸 하나만을 키우며 외롭게 시간을 보내다 암에 걸린 할머니.99년 4월 어느날 교회의 한 복지사로부터 “우리가 돌봐줘야 할 할머니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처음 75세의 박할머니를 만났다.그를 만나던 날 나는 30여분동안 할머니가 내쉬는 긴 한숨 소리만 들어야 했다.

“목사 양반,지난 세월 나는 참 외로웠수다.신의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지.6·25가 나고 남편과 나는 딸을 데리고 피란길에 들어섰는데 남편이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죽고 만거야”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됐다.“난 억척스럽게 살아왔수다.어떻게든 이 남한에서 내 딸과 뿌리내리기 위해 더럽고 악한 일만 빼놓고 안해본 일이 거의 없었지”

그러던 할머니가 두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이 보라우 목사 양반! 지금 내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데 한달 후 죽는다는 기야.어떻게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갔소! 내 몸이 암공장이래,암공장… 어데서 암덩이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는 기야”

한껏 소리치던 할머니는 죽기에는 억울하다며 딸 걱정을 했다.“많이 살긴 살았지.외국지사에 나가 있던 딸한테 내가 한달 후 죽을 것 같다고 하니깐 그날로 딸은 계속 울기만 해.곧 한국에 들어올텐데…”

할머니는 내내 혼자 말씀하셨다.나는 ‘얼마나 외로웠으면 저럴까’ 싶어 그냥 듣기만 했다.할머니는 나를 만나기 얼마전부터 교회에 나가게 됐다.거기서 할머니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지금껏 내 것을 내가 먹으면 되고 네 것은 네가 먹고 살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왜 교회 사람들은 자꾸 나를 도와주려는지 알 수 없어”

그러면서 할머니는 이렇게 찾아와주는 것이 고맙다며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할머니에게 “한달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지만 하루하루 더욱 최선을 다해 사셔야 해요”라는 말로 위로했다.할머니는 차츰 감정의 변화를 보이며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할머니가 가끔 혼수상태에 빠지면 지켜보던 딸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다.모녀는 병상세례를 통해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할머니는 죽기 바로 전날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목사 양반의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50여년이 지나서야 깨달았수.목사 양반,천국에서 보자우.거기서 만나면 내가 목사 양반 발을 씻어줄게” 할머니는 사랑하는 딸을 남겨두고 그렇게 눈을 감았다.


2. 순탄했던 학창시절…대입후 전공갈등 방황 

나는 53년 7월19일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전통적인 유교집안 며느리로 들어와 아들을 못 낳아 걱정이 태산이었던 어머니는 갓 태어난 나를 들쳐업고 온 동네를 떠나갈 듯 자랑하며 다니셨다고 한다.부모님은 딸부잣집 외동 아들로 태어난 나를 끔찍이 여기셨으며 그만큼 내게 큰 기대를 걸었다.

나는 이런 부모님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언제든 집을 나가겠다고 다짐했다.초등학교 5학년 때 누나와 함께 전주로 이사와 자취생활을 시작했다.그러나 부모님은 소소한 일에도 걱정이 앞섰고 결국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끌려오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은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혹시라도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까 항상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다.교육자였던 아버지는 급기야 중·고교 때는 내 담임선생까지 맡았다.그러나 부모님은 간섭하는 만큼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셨고 인정해주셨다.부모님은 비록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교회에 가도 전혀 반대하지 않으셨다.

학창 시절 교회에 대한 기억은 성탄절에 빵을 얻어먹기 위해 찾아갔던 것이 거의 전부다.당시 나는 고아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고 그러다보니 먹을 것을 준다면 어디든 달려갔다.그 뿐 아니다.나는 일주일에 한 두번 그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근사하게 식사대접도 했다.아버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항상 강조하셨기에 내가 고아들과 어울려도 전혀 내색을 않으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친구들은 나를 참 좋아했고 잘 따랐다.또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던 나는 가끔 나무판자나 종이를 이용해 이것저것 잘도 만들어 냈고 그 것들을 친구들에게 나눠줬다.글을 잘 썼던 나는 교내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으며 정성이 담긴 편지도 친구들에게 자주 보냈다.

부모님의 관심 때문에 나는 별 탈없이 10대 학창 시절을 보냈다.이 시절 내 꿈은 의사였다.그러나 대학 입학을 앞두고 부모님은 내게 다시 개입하셨다.내가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남들보다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아셨던 부모님은 내게 공대 지원을 적극 권유했고 마지못해 나는 중앙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전공에 대한 갈등을 겪으면서 나는 우울한 20대를 보내야 했다.

이렇다보니 학업은 멀리하게 됐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만 때문에 술과 담배를 가까이 했다.점점 내 삶은 황폐해져 갔다.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겼던 어머니는 졸업을 앞둔 내게 갑자기 선을 보라고 강권했다.여기까지 부모님 의사대로 밀려왔는데 무엇을 더 망설이겠나 싶어 나는 여자 만나는 것도 어머니 뜻에 따라 80년 추운 겨울 성탄절날 한 여인을 만났다.하나님과 함께 그린 내 인생의 수채화는 바로 그 여인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3. 첫선의 선물 ‘놀라운 변화’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셨다.선보는 날 1시간여 늦게 나갔다.제대로 몸도 못가누며 겨우 한마디 꺼냈다.

“안녕하세요.박남규입니다”

퉁퉁 부은 얼굴에 말 할 때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앞에 앉은 여인은 악취에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내 걱정을 해줬다. “어제 술을 많이 드셨나 보네요”라며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그제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청초한 그녀에게서 상큼한 향기가 품어져 나왔다.

그녀의 미소에 빨려들어간 다음부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또 뭐라고 답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생전 처음 여자와 단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살아오면서 어머니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여성의 포근함을 발견했다.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저는 김미혜라고 합니다.저희 가족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저는 교회에서 반사로 봉사합니다”

나는 대뜸 “반사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그러자 그녀는 “교회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에요”라며 상냥하게 웃었다.

첫 만남의 기억은 이게 전부다.두시간 만에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줄곧 그녀를 생각했다.검정색 치마에 빨간색 코트를 받쳐 입은 그녀.어깨 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굵은 웨이브 머리.무엇보다도 그녀의 눈이 맑아 인상적이었다.다시한번 꼭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그 다음날 당장 연락을 했다.

그녀는 거부감 없이 나를 만나겠다고 했다.저만치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속은 좀 괜찮으세요?”라는 말이었다.

‘미혜씨가 나를 생각하고 있었구나’ 뛸듯이 기뻤다.

두번째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내 발걸음은 붕 떠있었고 ‘오늘은 무슨 말로 미혜씨를 기쁘게 해줄까’를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날 그녀는 헤어지기 전 한가지 제안을 했다.“저와 함께 교회에 가지 않으실래요?”

나는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 그녀를 따라 매 주일 교회에 나갔다.마음을 잡고보니 안되는 일이 없었다.좋아했던 술과 담배도 하루 아침에 끊을 수 있었고 그녀 덕분에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녀를 만나면서 차츰 내 생활은 안정을 찾아갔다.삶에 힘이 솟고 활력이 넘쳤다.그녀가 교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여자다”라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됐고 만난지 한달만에 그녀에게 청혼했다.첫 만남을 가진 그 다음해 1월30일 우리는 약혼했다.그리고 5월30일 마침내 결혼했다.

나는 아직도 화사한 5월의 하늘 아래 서 있었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아내의 그 모습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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