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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목회자의 꿈 (내 한몸 바칠 제단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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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조향록 목사

개울가에 버려진 생명처럼

예수님은 베들레헴 어느 객주집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우리 나라 고대 개국 설화에서도 고구려 태조 동명성왕과 신라 시조 박혁거세는 알에서, 후백제 시조 견훤은 지렁이에게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탄생설화들은 그들이 큰 나라를 세워 제왕이 되었거나,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봉된 이후에 씌어진 것들이어서 진위의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수긍할 만한 공통점을 가졌다.

그것은 정상적으로 설명하기가 곤란한 출생 과정이 있었다는 점이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다.

현실적 경우란 그 출생 과정을 사실로서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출생 설화에서 보인 의미는 신화로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느껴지는 경우를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출생 과정을 사실로서 기술했다 해도 출세한 후, 현재적 위치로서 그들의 됨됨이를 평가하려 한다거나, 또 먼 훗날,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이 그들을 평가하려는 선입견의 경향성으로 볼 때 오히려 그들의 출생 사건을 그들이 후에 격상된 인간 존재의 의미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되는 신화의 형태로 기술하는, 즉 신화화하는 것이 더 타당성을 띤다고 인식되는 경우다.

쉽게 말하자면, 개국 제왕이나 종교의 교주 등 신성시되는 특정 인물이 길에 버려진 기아였든가 혹은 이름도 성도 없이 떠도는 거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적당한 절차도 없이 어느날 큰 인물이 된 경우, 그들의 출생 사건을 비록 사실대로 밝힌들 듣는 사람들은 사실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조작된 신화에 더 신빙성을 부여하게 될는지 모른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은 정보화 시대, 그리고 인간의 생리현상을 과학화하고 역사 기술의 사실성을 우선하는 시대가 아니었던 옛날 사람들에게는 사실의 기술보다 그 인간의 존재에 대한 전달 방법으로써 신화가 훨씬 나을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나 자신의 출생 이야기를 기술하려는데 있어서 비록 약간 차이가 있고 비약고 있기는 하나 어떤 암시된 유사성이 있어서이다. 여기서 내가 나의 출생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서 먼저 한 마디 전제한다.

그것은 나의 출생 이야기가 오늘의 나 자신의 존재를 거론한 인물 등에 견주어 생각한다는 상관관계로서가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 하지만 그 해석과 평가는 나 자신의 독단적인 해석과 평가로써 국한한다는 점이다. 누구에게 좋게 평가받으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1920년 8월 3일(음)에 함경남도 북청군 거산면 건자포에서 태어났다. 다음의 이야기는 모두 나의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보통 출생지를 쓸때에는 태어난 집 번지와 그 집이 누구의 집인가 등을 써야 하는데 나의 경우는 그것들을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곳은 번지도 없고 집도 아닌 곳이었기 때문이다. 허허한 개울가 자갈밭에 수수나무 짚단을 둘러 세운 거지 움막 같은 곳이었다. 그 당시 함경도 늦가을 철이면 추수를 끝낸 수수 이삭을 잘라낸 수수나무 짚단 10개 정도를 위쪽으로 서로 비스듬히 맞대어 둘러 세워 놓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둘러 세운 수수 짚단 안은 하늘도 쳐다 보이고 밖도 내어다 보인다. 그리고 그 안은 2,3평 정도의 안방 같이 아늑하여 동네 아이들이 그 속에 들어가 소꿉놀이도 한다. 바로 그런 곳에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내가 그런 곳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내 아버지는 20세도 되기 전에 중병을 얻어 거동을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병환은 점점 더하여 대소변도 당신 힘으로 처리하지 못하니 온 집안이 졸지에 망하고 남은 생명들은 연약한 어머니의 어깨 위에 메워졌다.

어머니의 나이 스무 살이 조금 넘은 때다. 이제 더 어찌할 수 없게 되어 마지막 남은 재산이 조상의 뼈를 묻은 서산뿐인데 제사지낼 밑천으로 전답 얼마를 남겨놓고 그 선산을 팔아 노자를 마련하여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갈 데가 없다. 그래서 북청군 양화면에 아버지의 누님이 사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빈 집 한채를 얻어 한두 달 머물러 있으면서 앞날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아기를 엎고 우물에 물 길러 나간 사이에 부엌에서 화재가 났다. 불길은 순식간에 온 집에 번져갔다. 어머니가 물동이를 놓고 집에 달려와 보니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였던 아버지가 어느 사이인가 마당에 나와 누워있고 집안은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불길이 치솟자 엉겁결에 등밀이로 문지방을 넘어 마당에 나와 뒹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후에 이 때 일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다급해지면 못하는 일이 없는가 보다고 했다. 병신 몸으로 어떻게 용을 썼던지 자기 몸이 창문을 밀치고 나와 마당 한 가운데 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되자 매형의 눈초리가 싸늘해지고 누이조차도 가까이 있는 것을 큰짐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말꾼을 얻어 아버지를 싣고 시집간 어머니의 여동생이 사는 북청군 거산면 건자포라는 해변가 작은 마을로 갔다. 그 곳은 어민과 농민이 함께 살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을 넘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미리 소식을 전한 것도 아닌데 불쑥 손님이 찾아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내 이모님의 시아버지가 대문밖에 나와 사연을 듣더니 당장 말고삐를 잡아 밖으로 돌려세우면서 머물 자리가 없다고 하였다.

노인의 큰 소리가 몇 차례 오고 가자니 마을 늙은이 등 몇 명이 모여들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병든 아버지를 실은 말고삐를 잡고 그 집 앞을 돌아 나오는데 구경하던 동네 노인들이 따라 나오면서 병든 남편을 싣고 밤중에 어디로 가겠는가 하면서 동네 젊은이 몇 명을 불러 함께 수수짚단을 둘러막아 하루 밤을 쉬어 가라고 하였다.

어디로 갈 수도 없는 막다른 자리라 그대로 거기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 당시 추위가 오기 전이니 먹을 양식만 있으면 우선 얼마 동안 견디며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에 일자리를 얻어볼까 했으나 가난한 포구 마을에는 일거리가 없었다. 다행히 거기에서 10리 길도 더 떨어진 산간 지역에 철광석을 캐는 광산이 있었다. 그래서 그 철광에 가서 갱 속에서 뜯어낸 철광석을 부수어 쇳돌과 돌을 골라내는 일을 했다.

그 광산의 광부들은 대부분 중국인 노무자들이었다. 그 때가 1920년 가을, 그러니까 3.1만세 사건이 지난 1년간 독립을 갈구하는 한국인의 함성이 한국의 하늘을 덮어 밤 같이 어두웠을 때이다.

민족 수난의 시기에 우리 가정은 또 다른 시련의 맨 밑바닥을 헤매고 살았다. 전쟁보다도 더한 민족 수난의 시기에 흉년마저 겹쳤으니 산 사람도 죽은목숨 같았던 때였다. 구약성경에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왜 이런 시기에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가 라며 어머니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했던 것과 같은 시절을 우리는 산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전략적 가치를 위해 철광을 독점하고 체굴 노동자로서 중국인 노무자를 끌고 온 것이다. 그 광산 이름은 나흥철광이다. 최근 북한 소식을 전해주는 자료에 의하면 지금도 나흥철광이 있고 거기서 채굴을 계속하는 모양이다.

어머니는 그 때 나를 잉태하고 있으면서 죽어도 죽는 순간까지는 먹고살아야 하겠다고 매일 같이 광산에 가서 일하셨다. 노임은 만주에서 수입해 온 좁쌀을 얼마씩 값을 쳐서 받아오는 방식이었다.

그 지방 기후로서는 가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을 느끼게 하는 9월 16일(음력으로 8월 3일), 그날도 만삭이 된 어머니는 오전 중 즉 반나절을 광산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출산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 날밤 12시경 무렵,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나는 태어날 때 엎드러져 나왔다 했다. 그래서 내 아명을 업펑쇠라고 했다 한다.

그때 아버지 어머니는 아기를 낳았다는데 아기 출생에 관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자식을 낳았으나 반갑다는 마음도 먹어 볼 여지조차 없었다. 신병으로 누어 앓고 있는 아버지, 네 살 짜리 큰 아이를 등에 업고 광산총네 가서 일하다 오는 어머니에게 아기를 하나 더 가졌다는 것은 원망의 씨앗일 뿐이었다.

버리지 못한 것은 후에 어머니가 한 말씀대로 하눌님이 무서워서 그런 마음도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해산하고 나자마자 피묻은 속옷을 당신 손으로 빨아 입었다고 한다. 다른 도리가 없으니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 광산은 갱 속에서 캐어낸 철광석을 창구까지 운반하는 궤도차가 놓여 있었다. 그 궤도차의 레일이 수수짚단으로 둘러진 우리 집 곁을 지나갔다고 했다. 중국인 노무자들이 광산에서 일하던 만삭이 된 젊은 부인이 며칠 동안 보이지 않자 분명히 출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궤도차로 철광석을 운반하는 길에 밀가루 포대 몇 개와 그 속에 좁쌀 몇 되를 싸서 울타리 밖으로 내어 던져 놓았다고 한다.

아기와 산모의 앞가림이라고 할 수 있게 하라는 고마운 뜻이었다. 후일 아버지는 그 때 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인 쿠리들도 젊은 내외가 사는 곳이라 의심을 살까 하여 집에 들러보기를 삼갔던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노동자 중국 쿠리의 인정처럼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서로 믿고 살아도 좋을 만한 착한 사람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것이다.


2. 운명의 분수령

1957년 8월 20일 오후 11시. 나는 캐나다 벤쿠버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기차를 탔다. 벤쿠버에서 목적지 토론토까지는 밤낮으로 꼭 3일이 걸리는 기차 여행이다. 밤새도록 달린 열차는 다음 날 11시경에 록키산맥 정상을 가로질러 넘어갔다.

기차는 약간 속도를 줄이면서 정상을 향해 숨차게 오르고 있을 때다. 차내 안내 방송이 손님들에게 앉은자리에서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라고 하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철로를 놓기 위해 깎아 내린 흙벽과 그 흙벽 틈새에서 만년설이 햇빛을 받아 흠뻑 젖은 흙탕물이 질퍽하게 녹아 내리는 광경이었다.

곧이어 안내 방송은 바로 저 벽면으로 흘러내리는 물방울 줄기가 약간 동쪽으로 기울면 태평양으로 내려가고 약간 서쪽으로 기운 물은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했다.

정말 정상 꼭대기를 넘는 순간, 똑같이 흘러내리던 물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면서 순식간에 거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말과 글로서는 무수히 외우고 쓰던 분수령이었는데 막상 그 분수령의 진상을 보니 만감이 사무쳤다. 참으로 운명의 순간이었다. 동 서로 갈라져 흐르는 물은 그 순간부터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이렇게 운명을 결정 짖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나 그 삶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느 순간, 어느 마디에서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의 분수령이 있다. 그 순간은 당사자도 또 그 광경을 보고 아는 누구도 거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 작은 사건이나 나중에는 그곳이 그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운명을 결정하는 행위에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행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결단할 수밖에 없는 외적, 여러 요인들이 자기의 의사와 겹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의사나 결정과는 전혀 무관하게 남에 의하여 결정되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이것을 주어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지 1,2주일쯤 지나 어머니는 광산촌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갓난아기까지 합친 4식구가 굶어 죽는다는 절박한 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길이 꼭 살아갈 수 있는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산모가 아기를 낳자마자 중노동 일에 나선다는 것은 아기와 산모가 모두 죽는 순간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머니 아버지는 생명을 부지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다.

그 방법이란 갓난아기를 아들이 없는 누구에게라도 키우도록 주려는 결정이었다. 다행히 같은 마을에 사는 사공 내외가 아기를 가지겠다고 나섰다. 양쪽 결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 결정은 다시 번복하지 말도록 굳게 약속을 맺는 표적으로 동네 어른 몇 명을 정하여 술을 대접하고 그들이 증인이 되게 했다. 술값은 2원이었고 그 돈은 물론 아기를 가져갈 사공이 치렀다.

약속한 날 저녁, 사공 내외가 아기를 싸안고 갈 포대기를 장만해 가지고 왔다. 사공 내외가 아기를 포대기에 사 안고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려는데 아기는 울음을 터뜨렸고 아버지는 땅을 치고 서러워 통곡을 했다. 다섯 살 짜리 내 형은 엄마 목을 안고 울고, 엄마는 가슴이 찢어져 울고, 이렇게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사공 내외는 아기를 안고 물끄러미 서 있다가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못할 일이로군!'하면서 돌아갔다. 후일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너희 아버지야 그 때 아기를 보내는 것이 서러워서 울었다기보다, 아기를 누구에게 주어버리면 너희 엄마가 아이 하나만 업고 도망쳐 버릴까 싶어 울었겠지!'라고 농담을 하셨다.

그것도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술자리에 참여했던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서 하는 말이 '저 젊은 부인이 아기를 누구에게 주어버리고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말들이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씀도 없었지만 그후 약속을 파기한 책임을 지고 술값 2원을 갚기 위해 사공의 집 어망을 기워주느라 고생했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였다. 내가 사공의 아들이 되었다면 헐벗지 않고 굶지 않고 자랐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사공의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그 날 저녁 통곡의 사건이 내 인생의 운명을 바꾼 순간이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순간, 사공 내외가 아기를 안고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면 그것으로 끝났을 한 인간의 운명의 향방, 그런데 우연이면 우연이라 할 수도 있는 어떤 마음의 움직임이 나 하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한 것이다.

결국 나는 어느 쪽이던 사공이 되라는 팔자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성경 마태복음 4장 19절에 예수님이 사공이었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셨는데 나도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사람 낚는 어부로서 일생을 살게 된 것이 그저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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