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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결핵이 치료되고 민족과 열방을 향한 뜨거운 사역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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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찬양사역자 이춘길 전도사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아 민족과 족속과 열방을 향하여 크신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는 사역자로 쓰임 받고 있는 제가 연약한 저의 삶 속에서 모든 순간마다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기록하기에 앞서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영원히 저와 함께하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저는 김제에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 가난을 벗어 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지 저희 가족은 익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정착한 마을 중심에는 예쁜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그 교회의 이름은 남광 교회였습니다. 옛날 교회에서의 부흥집회는 동네의 잔치처럼 신앙인 외에도 구경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도 동네어른들을 따라 교회에 구경을 갔습니다. 교회 안에는 강대상 밑으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큰북을 누군가가 힘차게 치고 있었고 찬양 소리는 교회 터가 움직일 정도로 크고 우렁찼습니다. 저는 어른들에 떠밀려 맨 앞자리로 나가게되었습니다. 예배도중 목사님께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서 죄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두손들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그칠 줄 몰랐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은혜의 체험은 저를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그 부흥집회를 참석한 것을 계기로 언니와 제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핍박이 얼마나 심했던지 "내 주먹을 믿으라"는 아버지의 노여움 때문에 우리는 성경책을 마루에 감추어두고 놀러 나가는 것처럼 교회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여름 갑자기 날벼락 같은 슬픈 소식이 집안을 뒤숭숭하게 했습니다. 바로 큰오빠의 교통사고 소식이었습니다. 결국 오빠는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열흘 뒤에 학교 등교 길에 제가 또 쓰러졌습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저의 오른쪽 뱃속에 달걀 만한 혹이 만져졌습니다. 방학 내내 한약방을 다니면서 침을 맞고 약을 먹었더니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개학한 다음날 등교 길에 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고통 속에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습니다. 저에 몸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핵에 감염되어 있었고 맹장염을 잘못치료하고 방치했던 것이 병을 키워 맹장이 터져 버린 복막염, 그로 인해 뱃속이 온통 고름으로 뒤범벅이 된 것이었습니다. 교복을 입은 상태로 저는 급하게 수술대 위에 올려졌습니다. 위험한 죽을 고비를 넘긴 대수술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성공적으로 마쳤고 빠르게 회복되었습니다.

엄청난 일을 거듭 겪은 저희 아버님께서 충격을 받아 눈이 잘 보이질 않아서 3년 정도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 고난을 계기로 미신을 철저히 지키시던 어머니께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을 무척 핍박했던 아버지께서는 10년전 간암으로 투병하시던 중에 간절히 주님을 찾았고 영접했습니다. 돌아가시기까지 일년동안 누워 계셨지만 암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같지 않게 큰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고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저는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 다리가 관절염으로 부어 올랐습니다. 통증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습니다. 저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습니다. 먹는 것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해서 구토증세가 나타나고, 편두통으로 인해 신경쇠약증세까지 겹쳐 저는 바짝 말라갔습니다.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하면서 저의 영혼은 곤고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기쁨을 잃어갔습니다. 그러나 탕자된 저를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88년 11월. 저는 불신자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의 직장 때문에 부안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고 남편의 가정도 저의 가정도 어려운 환경이다 보니 한 울타리 안에 여러 가정이 살고 있는 산동네, 남편이 자취하던 월2만원을 지급하는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날 아침 저희는 방에 새어 들어온 연탄가스로 인해 구토증세를 일으키며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조금만 늦게 병원에 실려갔어도 우린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회복하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이 주어진 것처럼 세상이 온통 다르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두 번째 죽음에서 건져주셨지만 저는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았습니다.

89년 3월. 남편이 인사 발령을 받아 저희는 정읍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저에게 다가온 육신의 고통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어느날 밤 열이 40도가 넘게 오르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오른쪽 옆구리 갈비뼈 속이 결려오면서 저는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저는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경찰관이었던 남편은 야간근무를 나갔고 아무도 나에게 물 한 모금 가져다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외로움과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비몽사몽간에 저는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불신자였던 남편이 '하나님을 믿어야 내 딸은 낮는 병일세' 하시는 장모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저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권유했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저를 전도한 셈이었습니다. 89년 5월 저희 부부는 집 앞에 있던 정읍 순복음 교회에 나갔습니다 . 탕자 되었던 제가 병들어 초라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니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은 너무나도 포근하고 따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저를 사랑으로 안아주셨습니다. 현재 익산 왕성 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록경 목사님께서 정읍 순복음 교회를 담임하고 계실 때 말씀으로 저희를 잘 이끌어 주셨고 신앙 안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저희를 사랑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빠르게 신앙을 회복하여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선교회 활동으로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바쁘게 봉사, 헌신하는 가운데 제 몸을 감싸고 있던 모든 질병을 하나님께서 한가지씩 치료해 주셨습니다. 어느 순간 두통이 사라지고, 5년 동안 이유 없이 계속되던 갈비뼈 속 통증이 사라지고, 위장 장애가 없어지고, 디스크 증세로 고통스러웠던 목뼈와 허리뼈가 나았고, 관절이 치료되고, 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나님께서 만져주심으로 인하여 저의 몸에서 고통이 사라지고 저는 건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가난을 벗어보고 싶어서 89년 7월 5백만원 빚을 얻어 세평정도 되는 구멍가게에서 패션운동화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장사를 시작하는 날부터 신발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장을 통하여 얻은 이익금에 대하여 저는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미자립 교회를 선정하여 선교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불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난 남편과 신앙생활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자기의 월급은커녕 제가 드리는 십일조도 반대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일이면 노는날이기 때문에 모든 모임이 주일날이었습니다. 남편은 주일이 돌아오면 동창회니 향우회니 하면서 동부인하는 모임에 놀러가자고 야단이었습니다. 하루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에 매년 정기적으로 모이는 향우회 모임에 물놀이를 가자고 남편이 말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결국 며칠동안 다투다가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세상일 버리지 못한 남편은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날 따라 장마비가 많이 쏟아졌습니다. 저희 부부는 밤늦게 집에 돌아왔습니다. 시내에 들어오자 온통 시내가 물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야 허겁지겁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많이 와서 둑이 터져 정읍시내에 홍수가 난 것입니다.

시뻘건 물이 가득 차 있는 가게를 바라보면서 저희는 정신이 나간 듯이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안에는 물이 가득 찼고 모든 물건은 하나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교우들은 밤늦은 시간까지 가게를 깨끗하게 청소해 주고 돌아갔습니다. 그일 이후로 남편은 저에게 주일에 놀러가자는 말을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성실하고 부지런했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너무도 사랑하여 돈버는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었습니다. 시골에 우(牛)사를 빌려놓고 한우를 키웠습니다. 조금 지나자 어미가 새끼를 낳았는데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송아지의 값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소리치며 화를 불끈 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송아지는 신음신음 앓다가 죽었습니다. 두 번째 송아지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남편은 소를 다 팔아버리고 밭을 빌렸습니다. 그리고 넓은 밭에 묘목을 가득히 심었습니다. 그러나 그해에 한 그루도 남지 않고 다 말라죽었습니다. 남편은 또 다른 일을 시작했습니다. 달팽이를 길렀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계산대로 자라주지 않았습니다. 또 실패했습니다. 여름내내 참깨를 심었습니다. 거두어들인 것은 겨우 40kg 이었습니다. 남편은 하는 일마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십일조 말만 꺼내면 혈기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정확히 드렸던 저의 사업장에 복을 주셔서 날로 번창했고 모든 것이 형통했습니다. 그런데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되어도 기다리는 아이가 생기질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고 의사의 '아내 쪽에 불임의 원인이 있습니다'라는 말에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없이 필름 속에 찍혀 있는 나팔관은 양쪽이 다 유착되어 있었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는 꼼짝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질 않았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저는 고개를 저으며 받아들여야 할 현실을 부인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삶은 끝난 것 같았습니다.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절망하는 남편의 얼굴이 바위처럼 다가와 제 얼굴에 맞닿았습니다. 저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몸부림치면서 절규했습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복강검사를 해봤지만 역시 불가능이었습니다. 남편의 위로도 저를 평안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허리가 잘려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낄 만큼 간절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어느 날 주님의 크고 부드러운 손길이 내 어깨 위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릎꿇고 있는 제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의 손에 갓난아기가 들려 있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세상에서 느껴보지 못한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27절에 '평안(平安)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말씀을 저는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 저는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제 마음속 은 잿빛 하늘이 변하여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온통 아름다웠습니다. 걸어도 발이 땅에 닿지 않았습니다. 절망과 낙망이 변하여 희망과 소망이 되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사로잡혔던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했습니다. 쓸모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수없이 죽고 싶었던 마음도, 제 자신을 학대하던 마음도, 삶에 의욕이 없던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퇴근 시간에 종이 한 장을 들고 목소리가 소프라노 톤이 되어서 들어왔습니다. '여보 우리도 아이를 가질 수 있어, 여기 희소식이야'하면서 내민 것은 불임부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인 시험과 아기 시술에 관한 신문기사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처음 접한 소식이었지만 제 마음속에 한줄기의 빛이 비추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각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서 아이를 주시려나 보다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금식하고 작정하며 우리 나라에서는 시험관 아기로 유명하게 알려진 서울에 있는 차 병원에서 시험관 아기 시술을 시도했습니다. 이 시술은 시작해서 임신반응 검사가 나오기까지 3개월 정도 소요가 됩니다. 장기간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하기 때문에 저는 주사 맞는 법을 배워서 하루에 두 번씩 직접 엉덩이에 주사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식을 한 후에는 보름정도를 최대한 움직임을 절제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 3개월의 기간은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하는 모든 불임 부부들에겐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참으로 힘겨운 기간입니다. 임신반응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 저희 부부는 서로가 수화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남편이 설레임 반 두려움 반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의 얼굴은 굳어졌습니다. 남편은 저를 위로했지만 자기 자신도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시험관 아기 시술을 성공해서 아기를 갖게된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개는 몇 번씩 시도해서 얻은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아주 실망되지는 않았습니다.

몸이 회복되자 저희는 다시 시험관 아기 시술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고 3차, 4차...., 그렇게 7번을 실패하고 저의 몸과 마음은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도할 힘을 잃었습니다. 아이가 없는 정적이 흐르는 집,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침상에 누워 의욕 없이 누워있었던 수많은 시간들, 저는 우울증에 빠져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남편과 제가 무더위를 피하여 산을 올라가 골짜기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와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와서 즐겁게 놀고 있는 겁니다. 저는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엄마 아빠들의 모습을 보자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섰습니다. 산을 내려가자고 예기한 이후에 저는 다시는 휴가를 즐기거나 야외 소풍을 요구해 본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낙망하는 마음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데 갑자기 제가 새벽 기도할 때 찾아 오셨던 주님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안고 계시던 주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저는 시험관 아기를 7곱번이나 하는 동안 아이를 안고 계시던 주님을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저는 남편에게 시험관 아기 시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92년부터 찬양 사역자가 되기를 기도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96년 9월에 섬기는 교회에서 찬양 선교단을 창단 할 수 있도록 은혜가운데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찬양인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몸부림치는 고통의 순간들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뜨거움으로 나를 인도하셨고 온전하게 드려지는 찬양에 대한 갈급함으로 저를 목마르게 하셨습니다.
찬양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96년 9월 찬양 사역자이신 김민식 전도사님께서 인도하신 '하늘로 찬양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진정한 찬양 드림을 알게되었고 찬양가운데서 저의 깊은 내면의 아픔을 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가치 없는 존재라고 수없이 죽을 생각을 했던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피 값을 치르고 나를 사셨다는 그 사랑을 깨닫고 저는 수없이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저는 1기, 2기 찬양학교를 수료하는 동안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흘러 넘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찬양에 대한 뜨거운 마음으로 불타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생을 찬양의 삶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사명자로서의 뜨거움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감고 기도하기만 하면 제 마음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말씀을 주시면서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저는 주체 할 수 없는 기쁨에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사명자로서의 가정을 세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저와 저에 가정을 고통 속에서 주님 곁으로 가까이 끌어 당기셨고 변함없이 저를 향한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걸프전쟁이 시작되면서 전반적인 경기가 어려워졌지만 3평에서 시작했던 저에 사업은 날로 번창해 나갔습니다. 96년 6월 저는 다소 무리를 하여 1억이라는 돈을 대출 받아 남성복으로 품목을 바꿔 사업장을 확장 이전했습니다. 그런데 사업확장 이후 경기가 급하게 곤두박질하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했고 거리마다 문닫은 가게는 늘어만 갔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업경영은 날로 어려워지고 겨우 대출 받은 이자와 월세를 주기에도 빠듯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이미 찬양 사역자로 쓰임 받고 싶은 간절함에 불타고 있었고 찬양학교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명자의 길을 가기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장은 원금을 전혀 값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1억이라는 빚이 저의 어깨를 짓눌러 왔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근근히 유지해왔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계하더라도 6천 만원도 못 받을 형편이니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지역 신문광고에 가게를 내놓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사명자의 길을 가고싶은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그러나 빚을 지고서는 기쁨으로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도와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일주일만에 인수할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97년 11월 15일 저는 1억원을 들고 이 은행 저 은행을 다니면서 빚을 값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놀랍도록 정확하신 분이셨습니다. 할렐루야!

저에 남편은 경찰공무원이었습니다. 근무 성격상 주일 성수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남편의 주일성수를 놓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세례(침례)식을 통하여 조금 변화되어갔고, 몇 년 후 집사직분을 받으면서 신앙이 점점 자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술도 끊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하겠다는 저의 말에 의외로 남편은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하면서 일년 여 동안 완강히 거부했고 대화할 때마다 우리사이엔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명자의 길을 생각하면 저는 날아갈 듯이 기뻤고 남편이 반대하면 세상에서 살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미 저는 사명자의 길을 선택하고 사업장까지 처분했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빚을 다 갚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식탁 위에 쪽지 한 장이 놓여 있었습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남편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는 남편의 급한 쪽지였습니다.

저는 급한 마음에 바닥에 털썩 주저 않아 기도했습니다. '주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서 일어나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1년 전 교통사고 처리 반에서 근무할 때 처리했던 교통 사고 건이 감찰결과 적발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진단서가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근무하며 죄인을 다스리던 그가 죄인이 되어 앉아 있는 남편을 보자 저에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97년 11월 21일 가게를 인계하고 일주일만에 TV에서는 IMF가 발표되었습니다. 아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을 위하여 정확하게 일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면회 중에 IMF를 면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저는 남편의 복직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습니다. 매일 변호사를 만나고 힘써달라고 매달리듯 당부하며 그를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진전되지 않고 더 악화되어갔습니다.

저 혼자서 진정서를 받고, 탄원서를 받으며 분주하게 다녔지만 가족들도, 주변인 어느 누구도 나의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어느날 변호사 사무실을 나오는데 갑자기 제 머리속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는 시편 146편 3절 말씀이 생각나면서 제 마음속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차 속에 얼른 들어와 북받쳐 오르는 서러움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의지했던 나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눈물로 회개하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매일 한번씩 남편을 면회하러 갈 때마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무지함 때문에 이러한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에 상기되어 있는 남편 앞에서 밝은 모습으로 찾아가 소망의 대화를 나누고 돌아서서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새벽기도 때마다 차가운 마루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며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겠기에 3일 금식을 작정하고 남편은 철장 안에서 저는 밖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새벽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제 마음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오른손을 들어라' 저는 번쩍 들었습니다. '네 남편에게 복주고 복주며 복주리라' 저는 감사에 눈물을 흘리며 '아멘' 하였습니다. 제 마음속에선 평강이 흘렀습니다. 그날 오전에 남편을 면회하는데 3일 금식한 사람 같지 않게 남편의 얼굴에 번쩍 번쩍 광채가 났습니다.

남편의 얼굴에서는 기쁨이 넘처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에 제 남편과 저에게 동시에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남편은 이렇게 첫마디를 꺼냈습니다.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에 큰 뜻이 있는 것 같소, 당신 기도 많이 하시오' 라며 '인간적인 생각으로 당신의 부름 받음을 반대했던 것 미안하오'하는 말과 함께 '큰 꿈을 가집시다'힘있는 소리로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그때에야 성령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된 것이었습니다. 그날밤 남편은 석방되었고 교회에서는 부흥집회 기간인지라 특송을 하게되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눈물로 '똑바고 보고싶어요'를 찬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하나님께 감사하여 결혼 예물로 서로 주고받았던 금목걸이와 금반지를 빼서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헌물로 드렸습니다.

98년 1월 15일 2개월의 짧고도 길었던 유치장 생활을 마치고 남편은 은혜에 충만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직장을 잃게되었지만 저희 부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의지하여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저의 신학교 입학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준비해 주었고 마감일이 지났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추가 접수되어 저는 그해 3월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5월에 남편에게 전직의 경험이 바탕이 된 현대해상 자동차 보험 대리점을 개점케 하셨고 남편의 손에 복 주시겠다고 하셨던 약속의 말씀을 따라 남편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분주하게 일하는 보험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그때부터 정확하게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지금은 온전히 주일성수하며, 선교단에서 드럼을 치면서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고 헌신 봉사하며,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신학1학년 여름이었습니다. 금식수련회를 마치고 마지막날 폐회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일어서기전 우리는 합심해서 통성으로 마무리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차 저의 깊은 곳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눈물이 터져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왜 이런 눈물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고 했던 기도가 아닌 다른 방언의 기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제 입술에서 이상한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다윗과 같은 아들을 주리라, 다윗과 같은 아들을 주리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런 기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에 아들을 주시면 찬양하는 아들로 쓰임 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저는 금식기도 3일에 자녀를 응답 받는 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브라함이 이삭을 응답 받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렸던 것처럼 저희 부부는 기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요14:27)

찬양사역자 이춘길 전도사의 간증(4)


99년 5월 신학교 2학년이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한국 복음성가 협회에서 개최한 주부복음성가 경연대회를 통해서 동상을 수상하게 하셨고 인증 받은 찬양 사역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꿈꾸어 오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찬양해왔던 것처럼 저는 주님을 마음껏 높여드리고 찬양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했습니다.
찬양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어디든지 주님께서 가라하시면 가겠다고 기도했습니다. 민족과 족속과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을 높여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음반을 취입하기 위하여 준비하던 어느날 목소리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유치장에서 고생했던 아픔을 통해서 제소자들 가정의 아픔과 제소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았던 저는 그 시기에 동료 사역자의 소개로 교도소 사역하시는 김모세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을 만나는 순간 저는 그분에게서 신실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담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떡과 빵을 먹이기 위해서 자신의 가정을 돌볼 겨를조차 없는 삶, 하루하루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공급받아 살아가는 삶, 그러나 늘 나누어주고 베푸는 삶,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부요한 삶, 그 목사님에게서 저는 참 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담 안에 갇혀 있는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은 뜨거움에 계획되어진 시간에 찬양을 들고 형제들을 찾았습니다. 뜨거운 찬양과 목사님의 열정적인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통해 형제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사역이 참으로 보람되었습니다.

교도소와 같은 특수사역은 대부분 모든 사람이 꺼려합니다.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그리고댓가도 없이 끝없이 베풀어야 하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준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재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형제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할 뿐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를 쓰러뜨리기 위하여 날마다 공격해 옵니다. 어느날 목에 견딜 수 없는 통증과 함께 몸에 감기 기운이 돌았습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을 담 안에 형제들을 생각하니 주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새벽 4시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쁘게 준비하고 춘천교도소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전 9시30분 예배와 오후 1시 30분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몸이 너무나 지쳐 겨우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온몸에 열이 오르면서 4일을 앓아 누웠습니다. 그런데 몸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목은 통증과 함께 갈증으로 바짝 말라갔습니다. 저는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고 '2차 결핵감염과 목에 혹이 두 개가 나있는 성대결절' 이라는 검사결과를 받았습니다. 고난을 통한 연단은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성대결절' 사실 찬양 사역자에게는 치명적이지만 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일을 준비하고 계시는구나 오히려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욥기 23장 10절 말씀처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지금껏 모든 연단 후에는 더 좋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에 통증이 심해지면서 한마디의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리내어 기도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무릎꿇고 앉아서 아픈 목을 가다듬어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것'이렇게 몇번을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 마음을 노크하셨습니다. '네가 진정 찬양하고 싶으냐?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찬양할 수 없다면 저는 삶에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목에 통증 때문에 영혼으로 울부짖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방법으로 저의 재능으로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은 재능으로, 기교로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혼의 진액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제 사역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핵과 성대결절이 복합되면서 육신은 날마다 쉽게 지쳐오고 목은 아파서 제대로 찬양할 수가 없었습니다. 초청 받은 사역지에서 찬양하다 중간에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저는 거절하지 않고 사역지를 향했습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날 공주교도소에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목의 상태로는 찬양을 할 수 없었지만 믿음으로 찬양드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중간에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저는 그냥 울었습니다 . 찬양을 멈추고 '형제 여러분 저는 지금 찬양을 할 수 없거든요, 아니 하면 안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불타는 마음에이렇게 왔습니다. 목을 사용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의사의 신신당부에도, 또한 2번씩이나 나를 침투해온 결핵은 나의 몸을 힘들게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저는 이렇게 섰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저와 여러 번 만났던 형제들이었기 때문에 저도 울고 형제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부족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은혜를 부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몸부림치며 찬양하던 한 형제가 찬양을 마친 후 짧은 간증을 하는데 찬양 중에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면서 간증을 하는데 제 가슴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일년 여 동안 저는 질병과 싸우며 진정으로 드리는 찬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그 누구도 찬양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8개월만에 결핵은 치료되었고 성대는 점점 회복되어 지난 9월달 1년만에 음반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음반을 마치자 마자 민족과 족속과 열방을 향하여 쓰임 받기를 기도했던 간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보름동안 뉴욕에서 찬양을 통한 선교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제 삶 가운데서 저를 단련하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제 인생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주님만을 찬양할 수 있도록 겸손히 무릎꿇고 기도하기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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