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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격동의 현대사속 내 삶 지탱해준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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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격동의 현대사속 내 삶 지탱해준 뿌리 

- 지명관 교수

내게서 크리스천이라고 불릴 만한 신앙을 찾는다면 일제치하 어린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맹추위가 기승하던 북녘 땅의 눈내리는 새벽,빙판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며 흥얼거렸던 크리스마스 캐럴을 잊을 수 없다. 어머니 뒤를 따라 졸린 눈을 비비면서 교회 옆 경찰서 감방을 향해 ‘기쁘다 구주오셨네’를 불렀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이 되자 이 마저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나치게 민족 감정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전면 금지됐다. 그러면 그럴수록 어린 마음속 한쪽에는 나라 잃은 한이 맺히고 또 맺혔다.

그 당시 교회는 가난한 농민들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고 길을 비춰주는 등대였다. 특히 어머니는 홀로 된 가난한 젊은 여성에 불과했지만 교회에서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나님을 체험하고 찬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초대 교회적인 영상이 내게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교회 틈에서 잠시 방황하기도 했다. 성도들간 교제와 성경말씀 속에서 자라면서 “봉사하라”는 엄중한 음성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다. 말씀에 따라 전진하는가 하면 힘없이 쓰러져 포기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성경 말씀이 큰 위로가 됐다. 그리고 변함없이 승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확인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1945년 광복에 이어 60년,87년의 혁명적인 역사가 곧 하나님의 승리로 다가왔다.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그것은 내 뜻을 넘어서서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공허하기 짝이 없는 세상 속에서 그 가르침만이 실낱 같은 의미를 부여해주고 내 삶을 지탱해줬다. 내가 허둥지둥해도 나를 붙잡아줬고,흑암 속에서도 빛을 보여줬다. 그 말씀 없이 어떻게 이 땅의 거친 삶을 이어갈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신앙의 기초는 일제시절 어머니를 통해 닦였다. 어머니는 신앙에 엄격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에는 상당히 관대해졌다. 주일도 아껴가며 공부한다고 하니까 나무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고 그 강권하심에 내가 견뎌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셨던 게 아닐까.

일제 치하에서 고난받던 교회에 대한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광복 후 교회에 대한 일종의 회의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한국 교회는 고난을 극복하는 데에는 강했지만 평안한 상황에서는 약해진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지난날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나에게 전 교회적인 사랑을 베풀어줬던 교회라는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런 사랑을 이어간다기보다는 남으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기만 기대했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종교를 찾는다면 속세를 떠나 어떤 수도원적인 것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나에게 경종처럼 다가온 것이 6·25전쟁이었다. 군에 입대해 전선 계곡 사이에 위치한 사령부에서 기거하는 내게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라곤 없었다. 생명을 너무 쉽게 죽이고 그 수를 집계해 보고하는 상황에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운명 속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니…. 그럼에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얘기하고 인간을 ‘빛의 자녀들’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곳,천막 속의 교회는 마치 나를 건져내 보호해주는 고도(孤島)같았다. 그때 내 내면에 변화가 생겼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기보다는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내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것 없이는 마음의 평안과 삶에 대한 힘을 얻을 수 없었다.

인간을 적이라는 이름으로 그 생명을 앗아가는 마당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것인가.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 삶 속에서 남에게 지는 것을 권고하는 패배의 미학. 이것이 신앙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죽음 속에 오히려 종국의 승리가 깃들어 있듯이.

그렇게 해서 난 교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때로는 좌절했다가 일어서면서 긴 인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셈이다. 그 옛날에 비하면 오늘의 교회는 너무나 자유롭고 부유한 터전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가난한 교회가 아직도 여기만 아니라 전 세계에 널려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엇보다 내가 떠나온 북녘 땅이 지금 복음이 너무 척박하다고 슬퍼하면서.

‘떠나온 북녘 땅에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지 못하고 가는가’라는 탄식이 요즘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다. 예루살렘을 다시 찾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생명이 다할 수밖에 없었던 성경 속의 선인들이 지녔던 아픔이 되살아난다. 일제시대 때 중국이나 미국 등지에서 조국을 그리면서 그 생명에 끝을 맺어야 했던 선열들, 그들의 슬픈 마음을 이어가는 회상 속에 우리의 신앙이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 누구인가?… 192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김일성대학 1회 입학생인 그는 1947년 월남한 후 6·25전쟁에 통역장교로 참전했고 이후 64년부터 1년반 정도 '사상계' 편집주간을 맡았다. 72년 일본으로 건너가 93년까지 도쿄여대에서 한국역사 등을 가르쳤다. 68세에 귀국해 한림대 석좌교수와 일본학연구소 소장,KBS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경기도 안양에 거주하며 부인 장정숙(72) 여사와 함께 안양평안교회(정규천 목사)에 출석하고 있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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