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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나는 왜 크리스천인가] 성경서 찾은 진리와 생명 ‘극성팬’은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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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일 장로 (이태원감리교회·소설가)

로마 사람들은 어떤 충성스러운 집단을 지칭할 때 그 충성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이름에 ‘이아누스’라는 어미를 붙여 사용했다. 즉 황제의 군사는 가에사리아누스였고 갈바 군단의 병사는 갈비아누스였다. 사도행전에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크리스티아누스,즉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 명칭에는 다분히 선택된 요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은 그것이 필연적인 사건이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갈 1:15). 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공대 기계과에 재학 중 작가가 되고 40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성경 내용을 소설로 쓰기 시작해 마침내 ‘기독작가’로 불리게 된 신기한 사실이 지나고 보니 모두 처음부터 그분의 계획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 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6). 처음부터 기독교인의 가정에 태어난 것부터가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보다 더 운명적인 사건은 구한 말 포도부장이었던 외조부가 서양 선교사의 노방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것이었고 그 막내딸이 구세군 일을 하다가 천부적인 방랑자였던 아버지를 만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교회학교에 다녔으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문학하는 대학생들을 만난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자취하던 두 명의 대학생이 서울대 철학과 학생들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철학이란 말이 궁금해 그들에게 질문을 시작했던 것이 또 새로운 필연의 시작이었다. 그들이 시와 소설을 습작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글 쓰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철학 서적들을 찾아 읽었다.

나는 성경도 읽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찾아낸 수많은 의문에 대해 여기저기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교회를 떠났다. 나중에 보니 그것은 나를 작가로 길러내기 위한 ‘세상 공부’의 시작이었다. 나를 가르친 대학생들은 등단을 포기하고 교수가 되었으나 제자인 나는 스물 한 살에 작가가 되었다.

‘나이 사십이 되매…’(행 7:23). 모세가 40세에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망쳤던 것처럼 나는 40세에 거친 광야로 내몰렸다. 아내가 위암에 걸려 수술을 받고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받고 있을 때 나는 광야에서 별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연약함 앞에서 철학과 과학의 무력함을 깨달으며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중학생 때로 돌아가 질문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내가 쏟아내는 질문들마다 답변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약속했던 대로 그 답변들을 소설과 칼럼으로 써서 독자들 앞에 내놓게 되었다.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시 51:15). 그렇게 해서 나는 결국 ‘기독작가’가 되었다. 나는 스스로 그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내게 그런 호칭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붙여준 그런 호칭이나 회심 후에 쓴 49권의 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아낸 내 질문과 하나님의 답변이 더 중요했다. 그것이 곧 이사야서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대화였던 것이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대화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곧 아버지와 대화하는 아들이었다. 그는 새벽 미명이나 깊은 밤에도,그리고 산에서나 들에서나 늘 아버지께 질문하고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과 사람 사이에 막혀 있던 대화의 통로를 십자가의 피로 열어놓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비로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대화의 통로에서 성경 속의 수많은 의문과 암호를 풀게 되었고 진리와 생명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간 길이었고 그가 먼저 간 길을 내가 따라가게 되었으며 그러다보니 그의 극성스러운 팬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 나이 40이 되어 다시 성경을 붙잡으면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많은 질문을 했고 답변을 들었다. 그 감격적인 대화 속에서 그분의 인자와 진리가 내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또 새겨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다. 열심히 궁리하고 나름대로 애를 쓰지만 인생도 세상도 자꾸만 험악한 방향으로 떠내려가고 있다. 하나님은 와서 변론하자고 기다리시는데 사람들은 허망한 수렁으로 점점 더 빠져들어가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실족하여 그런 수렁에 빠졌을 때 다급히 부르짖었다.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13)

그 다윗의 소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가 와서 고난을 당하신 후에 많은 사람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의 길을 따랐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기다란 행렬의 맨 끝에 40이 넘어 가까스로 말씀의 자락을 붙잡은 한 작가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밖에 없다. 나를 부르신 그분만이 안내자이고 나의 성취자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는 그분이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분이 나를 알고 나도 이제 그분을 안다. 그분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도 역시 그렇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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