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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마음에 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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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찬수 목사(분당우리교회)

최근 야당에서는 유력한 두 후보를 놓고 대선 후보 검증 청문회를 열었다. 긴 시간 검증위원들이 쏟아놓는 예리한 질문에 답하는 양 후보를 보면서 어떤 결과가 있을지 궁금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청문회가 끝난 뒤 인터넷으로 쏟아진 반응들이었다. 마음에 이미 점찍어 둔 후보에 대해서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든 다 이해하고 포용하면서도 상대 후보에 대해서는 그의 어떤 대답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번 아프간 인질 사건에 대한 반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은 사건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양 극단으로 나뉘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사람은 결코 객관적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그것에 대한 주관적 감정이 우리의 태도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에 보면 ‘마음에 찔려’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한 번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이었고, 또 한 번은 스데반의 메시지를 들은 또 다른 유대인들의 반응이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동일한 메시지, 즉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해 유대인들을 질책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각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찔려’했다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강력한 말씀 선포 앞에 범죄한 그들의 양심이 심하게 흔들렸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전혀 상반된 결과다.

말씀 앞에 똑같이 ‘마음에 찔려’라는 공통된 반응이 있었지만, 2장 37절에서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7장 54절에서는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똑같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상황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찔림을 깊은 회개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계기로 삼은 반면 어떤 사람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강팍’에의 길을 선택하였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주관적으로 필터링해 듣고 있지는 않는가? 이미 마음으로 그 후보를 좋아하기로 결정하고서는 그 후보에 관해 좋은 것들만 필터링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자기 듣기에 좋은 것들만 걸러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누가 약간 다른 입장에서 조금만 지적해도 분히 여기며 이를 가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가?

지금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독선적이라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의 지적과 시선이 아프고 따갑다. 위기를 만난 한국 교회와 성도들은 분함을 야기하는 독선적인 자기 필터링을 내려놓고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깊이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꼭 그래야 한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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