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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주로 인해 달라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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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유명애 권사 (진흥아트홀 관장)

나는 평양에서 유두환 목사님 손녀로 광복 전전날 태어났다. 친가 외가 모두 기독교 가정으로 내가 4대째 기독교인인 셈이다. 어려서부터 교회학교에 빠지지 않고 다녔고,교회의 중요한 제직의 자녀이니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사모이신 할머니는 성경 속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셨고,늘 큰소리로 찬송을 하면서 집안일을 하셨다. 한국전쟁 중 친가의 온가족 20여명이 피란을 내려와 인천에 사시던 외갓집에서 거의 3년간 함께 살았다. 당시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함께 어울려 찬송을 하곤 하셨다. 두 분 다 돌아가신 지 3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두 분이 맷돌질을 하면서 듀엣으로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를 부르시던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어찌보면 어렵기 그지 없는 사돈간인데 친가 외가 23명의 식구들은 한솥밥을 먹으며 전쟁통을 보냈고 그 후로도 아주 가깝게 살아왔다. 늘 주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말이다.

외조부는 맹인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글점자 훈맹정음 창안자 박두성 선생이시고 외조모는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 기숙사 사감을 지내신 김경래 권사님이시다. 나는 철저히 기독교 안에서 키워졌다. 내 퍼스낼리티를 분석해 보면 한국 교회교육의 문제점을 다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다. 게다가 선량한 의사이신 아버지 덕에 경제적 어려움도 없었다. 어머니는 화가이며 선생이었던 박정희 장로님이다. 꽤나 완벽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셈이다.

하지만 내가 구주 예수를 만나고 새롭게 거듭난 것은 40대 후반이었다. 그때는 이미 권사로서 교회학교 교사 20년 근속상도 받은,겉으로는 훌륭한 교인이었다. 성품이 기독교적으로 형성되었으니 사실 별 하자 없는 교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교회생활이 기쁘기보다는 부담스러웠다. 화가라는 것이 시간전쟁을 벌이는 직업인 데다 결혼한 여자로서 의무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나는 시부모님과 시할머니 세 분을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는 주부였다. 워낙 모범생 기질이 있던 터라 겉으로는 별 탈 없이 지냈지만 속은 평안이 없었다.

내 처지가 늘 불만스러웠다. 분노와 원망으로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므로 시어른을 잘 모시고 있다고 생각했다. 화가로서 생활도 이중적이었다. 욕심이 많고 모범생적인 기질 때문에 20대 후반부터 미술단체의 임원을 맡고 화단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았다. 화가와 교회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나는 피곤했다. 화단에서도 겉돌았고 교인으로서도 명쾌하지 못했다.

‘사람이 다 그렇지. 이 세상에 살면서 어쩌겠어’라는 것이 나의 변명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허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에게 얽힌 모든 줄을 끊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때 내가 자살하지 않은 것은 어릴 때부터 들어온 지옥이 무서워서였다. 거의 본능적으로 천국과 지옥을 알고 있었다. 나의 이성과 지성은 미신 같은 천국과 지옥을 부정해 버리고 싶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왜 죄인인지 몰랐다. 남한테 폐 끼치지 않고 자기 책임을 감당하며 몸 담고 사는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면서 살면 최상의 삶이라고 여겼다. 떠들썩한 개신교가 너무 무식해 보여 구교로 옮겨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무렵,북한산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갔다. 봄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 이른 봄,계곡에 고인 맑은물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작은 송사리 떼가 뿜어내는 생명의 힘에 전율했다. 둘러본 계곡의 바위들도 합창을 하고 있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늘 아버지가 허락지 아니하시면,그 중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질 수 없느니라.”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말씀들이 머릿속으로 휙휙 지나갔다. 저 작은 송사리도 살아있음을 저토록 기뻐하는데,이 커다란 생명 덩어리인 내가 생명을 기뻐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다음 순간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대가를 치르신 일이 뜨거운 사랑으로 사무쳐 왔다. 그 사랑 앞에 그 대속의 공로를 배신하고 있었던 나의 죄가 아프게 깨달아졌다. 그 동안 나를 붙잡고 있었던 허무가 바로 빈집에 다시 찾아들어 온 귀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후 3년 동안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듯 성경을 읽었다. 생수가 그 배에서 터져나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말씀 그대로 되었다.

‘당신은 왜 크리스천인가’라고 묻느다면 “나 자신이 예수님 때문에 너무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에 성경의 모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한때는 떠나고만 싶었던 화가 일이 이제는 선교사역의 도구가 되어 지구가 좁게 느껴질 정도로 뛰어다니며 쓰임을 받고 있다. 환갑이 넘은 나이인 데도 꿈에 취해 잠 못 이룬다면 기적이 아니겠는가! 성경 읽기는 계속되고 있다. 성경 속에는 많은 복음의 증인들이 있다. 그리고 예수 부활 이후 2000년 동안 복음의 증인과 그로 인한 사건은,요한복음의 표현대로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대로다. 내 심령이 기뻐 뛰며 주를 찬양하기를 원하니 나는 내가 크리스천임을 확실히 알고 있다.

◇ 유명애 관장은… 진흥아트홀 관장 유명애 권사는 1945년 평양에서 태어나 이듬해 서평양교회 박대선 목사에게서 영아세례를 받았다. 1975년 서울 상도감리교회에서 권사로 임직된 그는 현재 인왕장로교회(손동아 목사) 권사로 해외 선교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경기여고,세종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유 권사는 '박정희 유명애 수채화 모녀전'을 비롯해 개인전 6회,회갑기념 이혜진 정정주 유명애 3인전 등 수채화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한국미술협회 한국수채화협회 한국여류화가회 군자회 전업작가회 회원인 그는 제2회 대한민국 크리스천 아트페스티벌 운영위원장,기독미술인협회 한국미술인선교회 회장 등을 지냈고 현재 쉼의 집 '예예동산'을 섬기고 있다.

유명애 권사 (진흥아트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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