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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병을 이기도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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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정화성 권사(안동교회)

1981년 6월 17일, 이 날은 제 생애에 전환을 이룬 날이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시누이 내외가 귀국해서 우리 내외는 그들과 함께 충무 한산도로 관광을 떠났습니다. 고통스런 환자들을 돌보던 바쁜 생활을 벗어나 짙푸른 물이 오른 작은 섬들과 남해의 절경을 만끽하며 싱그러운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 오랜만에 자유와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충무공의 사당에 들어서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모근이 송연해짐을 느꼈습니다. 초대 기독교 가정의 보수적인 신앙 안에서 자라온 나는 향교나 사당에 가면 불안에 쌓이곤 했었으나 그날의 불안과 전율은 떨쳐버리기에 사력이 필요했습니다. 관광을 마치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낙동강 하류에 가까워지자 한 치 앞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안개가 자욱하고 비까지 내리는데 배는 전속력으로 달리므로 혹시 충돌한다면 하는 불안까지 겹쳐 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 선실 객석에 앉아 잠을 청했습니다. 잠시 후 심한 충격으로 눈을 떴을 때는 제가 탄 엔젤 6호 옆구리에 엔젤 5호의 선두가 틀어박혀 침몰되고 있었고, 옆에 서 있던 대형 재떨이가 목이 부리진 채 나의 왼쪽 가슴에 꽂혀 호흡이 완전히 중지된 상태로 숨을 쉬려고 몸부림쳤으나 한동안 쉬어지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저는 앞에 놓인 한 개의 구명조끼를 서로 입으라고 강권하던 중 남편은 강제로 나에게 입히고 가라앉고 있는 배의 높은 쪽으로 손목을 이끌고 나갔습니다. 나는 이끌려 가면서도 구명조끼가 없는 남편이 물에 빠진다면 하는 공포와 나 혼자 바다에 표류하며 살아 남는다 해도 고기밥이 될텐데 하는 두려움에 떨면서 남편이 구명조끼를 입고 나를 잡아주면 같이 살 수 있다고 애원했습니다.

다행히 구명보트에 구출된 우리는 두어 시간 후 해군 함정에 구조되어 죽음의 절박한 위기에서 살아남자 가슴의 통증을 심하게 느껴 살펴보니 왼쪽 유두가 반쯤 찢어져 있었습니다. 그후 소화의원을 개업했으나 때로 숨이 답답하고 부정맥이 나타나면서 의식이 흐려져 응급처치를 받게 되곤 했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았으나 특별한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기력 상태까지 겹쳐 내과에선 두 서너달 이상 견딜 수 없겠다고 느껴지는 상태가 돼도 의사들은 병을 진단하지 못했고, 남편에게는 "부인에게 좀더 잘 해주세요"라고 권면 하였습니다. 10여년 간의 시조모님 투병기와 7년여의 시아버님 투병기간 동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효를 다했고, 극치의 처사랑을 솔선 수범하신 시부모님의 보수적인 사고를 남편은 여과하는 부분 없이 받아들이는 효자이기에 의사들은 진단이 어렵자 대수롭지 않게 정신적인 문제로 간주했습니다. 저는 왼쪽 유방에 심상치 않은 통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호소했으나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고, 남편 역시 "아픈 데가 없다는데 왜 그러느냐"라는 말에 나는 깊은 고독과 우울증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항상 주님께 기도 드리던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날 사랑하여 주시고 건강과 평강을 주십사 고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안도 얻게 되고 건강도 많이 좋아져 친구들과 동남아 여행을 떠나게까지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더운 남쪽으로 갔기에 기후의 변화가 심했던 탓인지 가슴과 등 그리고 팔로 뻗치는 통증을 느껴 귀국 즉시 대학병원을 찾았으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너무도 답답하여 주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만일 커진 유방이 암이 아니라면 원래 상태로 작아지게 해 주시고 나쁜 조식이 있다면 빨리 제거시켜 주십사고.

4개월 후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유방암이 겨드랑이 임파선에 전이된 것을 의심하게 될 정도로 진행되어 있었습니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니 유방암이란 진단이 확정되고 겨드랑이의 임파선에 4개가 전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확실한 죽음의 선고 앞에 과거의 모든 것은 모래성과 같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내가 그렇게도 믿었던 첨단 의학이 나의 고통의 호소에도 어떤 진단을 내리지 못한 채 있다가 뒤늦게 암이 전이된 후에야 겨우 발견한 것입니다.

이는 의사인 나에게는 또 하나의 큰 충격이었습니다. 과거 20여년 간 연세의대 세브란스병원 마취과에 몸담아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던 세월들! 후학들을 양성하고 환자들을 돌보면서 가정주부, 엄마, 의사와 교수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 감당하기 위해 남자보다 3배의 노력을 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잠자는 시간조차도 아끼며 공부에 전념했던 그 많은 날들! 암으로 죽어간 많은 환자들의 말기의 참혹한 광경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스칠 때의 고통스런 심경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는 냉정하고 까다로운 성격탓에 주위 사람들에게 덕으로 대하기보다는 부담을 주어왔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봐 교회 밖에서는 크리스찬이라는 내색을 할 수 없었던 때도 많았습니다. 또한 심장마비나 호흡 정지로 죽어 가는 사람을 많이 살려 왔기에 의학적으로 최선을 다하면 죽을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와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제 자신이 암이란 진단을 받고 보니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 두려움, 절대 고독 속에서 헤어날 수 없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끈끈한 애착과 자녀들에 대한 짙은 사랑도 끊어 버려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모든 애착이 끊어지고 깊은 고독의 경지에 홀로 서게 된 저는 수술 후 5일째 되던 날부터는 하나님에 대한 사모로 마음이 갈급해졌습니다. 그 날밤 병원에서 주는 수면제를 먹지 않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먼저 구속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회개의 기도로 하염없는 눈물이 흘렀고, 히스기야 왕을 살려주신 하나님께 나의 과거에 어여삐 보실 수 있는 것이 단 한 가지라도 있었다면 불쌍히 여겨 살려 주시기를 간구하던 중 커다란 굵은 기둥 같은 것이 나의 가슴에 뿌듯하게 꽉 박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모태부터 믿어왔던 관념적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로 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 때부터 참 평안을 받은 저는 오직 삶에 집착하던 태도를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는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 군사라…' 387장 찬송을 하늘 천사들의 웅장한 찬양으로 들었습니다. 그 다음날 밤에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 했으나 허리가 아파서 앉을 수 없었고 누워 있기에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내 자의에 의해 기도를 드린 줄 알았으나 기도조차도 내 마음대로 드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며 지난날의 교만과 인간 본위의 삶을 또 다시 회개하였고 기도조차도 성령께서 인도하셔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무렵 안동교회에서는 창립 80주년 기념행사로 <엠마오로 가는 길>이라는 교회 오페라가 한국에서 초연 되었는데, 저는 암 선고를 받고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지 하는 생각만 하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온몸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신앙으로 자라왔기에 성령 받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체험을 못했었는데, 10년 전 교회 창립 70주년 행사로 <장엄미사>를 연주할 때 처음으로 성령이 임하셨을 때의 그 감동!! 찬양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마음이 물밀 듯 내 가슴에 자주 몰아치면서 80주년 교회 오페라 때에도 찬양을 드려야겠다는 뜨거운 열망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병원이 끝나는 시간과 연습시간이 맞지 않아 늦게 오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니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서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하나님 앞에 이를 때에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로 바뀌겠지만 찬양은 계속 드릴 아름다운 예배가 될 것임으로, 오페라 합창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려야겠다는 마음이 밀물처럼 밀려오면서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름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기어이 늦어도 좋다는 승낙을 받고 가족과 함께 연습에 임했습니다.

수술 스케줄이 잡힌 전날 밤 10시까지 연습할 정도로 열심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날까지 찬양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음날 수술하여 20여일 입원 중에도 오페라곡을 연습하고 외우면서 수술 부위의 통증을 잊을 수 있었고, 온갖 열의를 다해 연습하는 동안 몸의 회복도 빠르게 진행됨을 느꼈습니다. 미처 회복되지 않은 몸이었지만 사력을 다해 공연에 임했고, 작곡자 겸 지휘자였던 다비드 선생이 많은 감명을 받고 주는 격려로 힘을 더 내게 되었고, 공연 중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많은 교우들로부터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또한 주님의 섭리로 대학시절부터 필그림 합창단에서 연마시키고 준비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수술 후 9개월간 지속적인 치료를 받았기에 거의 완쾌되었으리라 믿고 중간 검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암이 늑골까지 전이되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받고 처음보다 더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위에서는 모 기도원에 가서 안수를 받으면 죽어 가는 사람도 살아난다는 권유를 했습니다. 생에 대한 애착은 집요하여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기에 기도원에 따라가 보았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눈앞에서 일어났고 성령수술이 시행되었으나 제 자신은 항암치료로 백혈구의 수가 감소된 상태에서 균이 들어간다면 균을 죽일 백혈구의 수가 적어 후일에 올 수 있는 합병증을 염려하는 의학적인 지식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은 환자를 치료하실 때 손을 얹고 안수도 하셨지만 보시지도 않고 말씀만으로도 하셨으며, 침을 뱉어 흙을 개어 눈에 바른 후 물에 씻으라고 하셨는가 하면, 주님 몰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유하셨는데, 모든 환자를 전부 고치신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했을 때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행하셨던 것을 기억했습니다. 또한 믿음으로 구하지만 치유의 여부는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임을 인정했습니다.

저는 주님 곁에 다가가기 위한 기도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늘 그의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지난 15년 간 고등부 학생들에게 가르친 말씀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기도하면서 죽으면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니 영광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시려면 치료해 주실 것이나 가장 중요한 것은 죽든지 살든지 나에게는 오직 주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모든 생과 사를 주님께 맡기고 나니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시므로 이 사랑 받고 쓰러지면 사랑의 빚을 질 것인즉 모든 이웃에게 이 사랑 갚을 수 있게 되기를 간구했습니다.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나의 영혼에 서광이 비치며 주님이 오셨습니다. 나 자신을 발견한 순간 교만하고 이기적이었던 지난날의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졌습니다. 뜨거운 눈물과 애끓는 통회가 우러나오며 감당하기 어려운 경지까지 진전된 병세도 감사의 조건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술도 주님이 주신 선한 치료방법이기에 의학적인 치료도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월 1회 3일 동안 입원하여 하루 1천㏄의 주사약에 가장 독한 항암제를 섞은 주사약을 투여하여 6개월을 치료하면서 받는 극심한 고통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으나 그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상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제아무리 체력이 강한 사람도 내가 받던 치료를 받으면 일주일 이상 먹지도 못하고 토하여 밥 냄새도 못 맡는다고 하나 나는 하루가 지나면 먹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는 나에게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고, 살리신다는 약속으로 믿어졌습니다. 15개월을 항암치료 받는 동안 머리털은 홀랑 빠져 율 브리너 같이 되었고, 팔과 다리의 혈관은 굳어져 주사를 목에 있는 혈관에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에 있는 남편 친구 의사들의 진단만이라도 그곳에서 받아보자는 권유가 있어 암치료 권위자인 헤이크 박사를 만났더니 치료를 그만해도 좋다는 진단이 내렸습니다.

저는 의사로서 최선을 다할 때 죽어 가는 사람도 살릴 수 있었던 경험으로 스스로 교만했고, 후학들을 양성하는 교수로서 권위의식을 가지고 살아왔으나 거듭된 죽음의 선고 앞에서 이 모든 것은 한낱 물거품과 같은 것이며, 나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간적인 안목으로 직접 바라볼 때는 갈등과 번민만이 있던 사람도 주님을 통해 바라볼 때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음도 체험하였습니다. 전에는 고난 없는 안이한 생활만이 축복이라 여겼으나 이제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신만이 축복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새 삶을 허락하시고 또한 고난을 통해 가정에 구심점이 이루어지고 결집되게 하신 주님께 더욱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전의 생활은 나 중심의 탐욕으로 살아왔으나 이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이웃을 위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세속을 향해 이기적인 욕심으로 치닫는 저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게 하신 그 은혜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찬양하며 영광을 주님께 돌리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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