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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기적의 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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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김영길 (한동대학교 총장, 한국창조과학회 명예회장)

서울대공대 금속과를 졸업한 1964년, 나는 미국 미주리주립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릴 때부터 항공기에 관심이 있었고 이것이 재료공학을 택하게 했다. 나는 첨단금속소재를 더 연구하고 개발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석사과정을 마친 뒤 곧바로 뉴욕에 있는 RPI 공과대학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 무렵 나는 고려대 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이었던 현재의 아내를 중매로 만나게 되었다. 주로 편지왕래를 했는데, ‘자신은 크리스천으로 교회에 같이 나가지 않으면 결혼이 힘들 것‘이라고 전해왔다.

나는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고 그런 신을 믿는 교회에 나갈 용의도 있다‘고 답장했다. 점수를 따기 위한 표현이었지만 나 개인적으론 큰 이변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안동군 임동면으로 심산유곡이다. 전통적인 유교집안이었기에 기독교를 접해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자동차를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이런 내가 기독교를 수용할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 결혼식을 가진 뒤 미국으로 다시 건너왔다.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은 나의 최종목표는 미 항공우주관리국(NASA) 연구원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가기 전 세계 최고수준인 이곳의 기술을 익히고 그동안 내가 닦은 학문을 본격적으로 활용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NASA는 워싱턴 DC에 본부를 두고 10개의 도시에 연구소가 있다. 나에게 해당되는 ‘재료·에너지연구소‘는 클리블랜드에 있으며, 이곳의 인원만 2천여 명이니 그 규모를 알만했다.

1971년 10월, 미 금속학회에서 박사논문인 ‘제트엔진에 쓰이는 특수합금‘을 발표했다. 이때 NASA의 에시부룩 박사가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연구‘라며 초빙의 뜻을 비쳤다.

그러나 이곳은 시민권이 있어야 했고 FBI에 신원조회를 의뢰하는데만 1년이 넘게 걸렸다. 할 수 없이 미 국방성 산하 ‘공병금속연구소‘에 있다가 1973년에야 NASA연구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NASA 연구원이 되다니‥‥’

아내와 나는 두 손을 잡고 기뻐했다.

NASA에서의 생활은 몹시 의욕적이었다. 더구나 나는 내가 썼던 박사논문의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어서 능률이 올랐다. 하루는 조밀이란 미국인 친구가 나에게 다가왔다.

‘닥터 김, 종교를 가지고 있소?‘

‘그렇소. 나는 크리스천이오‘

나는 당시 아내를 따라 한인교회에 출석했다. 그러나 교회는 내게 종교적 목적이 아닌 한국인들의 만나는 ‘미팅장소‘였고, 오랜만에 한국말을 쓰며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목사님의 설교는 ‘도덕적 지침‘이나 ‘윤리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열심히 듣는 편이었다.

크리스천이란 말에 조밀은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다.

‘화요일마다 낮12시에 크리스천 기도모임이 있소. 거기에 꼭 나오시오‘ 얼마나 당부를 하든지 다음 화요일 기도모임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나는 그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1백50여명의 박사들이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고 있었다.

‘첨단과학을 연구하는, 내노라하는 그들이 이렇게 열렬한 신앙을 갖고 있다니‥‥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불쑥 의문이 솟았다. 그와 동시에 그들 모두의 얼굴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렇다면 나는 왜 저런 기쁨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을까. 화요일의 기도모임 모습은 내 신앙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NASA의 크리스천모임에 참석하면서 성경지식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나의 신앙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기도 했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넘치는 평안과 기쁨‘을 나 역시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석학들이 이토록 열성적인 모임을 갖고 있는 것은 기독교에 무엇인가가 있다는 증거다. 내가 그것을 찾아보자‘

처음으로 성경을 펼쳤다.

아내의 요청에 교회를 다녔을 뿐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한글성경이 딱딱하게 느껴져 영어판 ‘리빙바이블‘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지극히 과학적인 탐구자세로 성경내용에 접근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문장의 맥과 의도를 정확히 집어내도록 노력했다. 마태복음에서 내가 느낀 첫 소감은 성경이 ‘고차원의 윤리교과서‘라는 생각이었다.

이 중에서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큰 감명을 주었다.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내 주어라‘ 등의 내용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 했다.

그 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등은 과학적으로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으며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성경을 인정하려면 과학을 무시해야 했다. 그동안 정설로 내려온 ‘질량보전의 법칙‘이 오병이어의 기적 앞에는 엉터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을 무시하고 어떻게 성경의 사건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나 혼자서는 해결하기 힘들었다.

‘이왕 시작된 성경연구니 확실하게 매듭을 짓자. 결과가 안나온다고 실험을 포기할 수 없지 않는가‘

나는 기독교서점으로 달려가 과학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신앙서적을 모조리 구입했다. 이 중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끈 것은 ‘기적의 이해‘란 책이었다. 내용이 쉬워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우주의 가장 기초적인 물질세계는 원자와 분자다. 그 다음이 무생물세계, 식물세계, 동물세계로 올라간다. 그 위로 영혼육을 가진 인간세계가 있고, 그 다음이 하나님의 세계, 즉 영적세계이다. 이 영적세계는 하나님이 주인이지만 마귀의 세계도 같이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은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세계 (기적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동물의 세계인 강아지가 대화를 하고 책을 보며 자동차를 운전하는 인간세계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영적수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기사와 이적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결정된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을 믿게 된다. 만약 성경 속의 기적들이 과학적으로 인간적인 지식으로 증명되고 이해된다면 기독교신앙은 믿을 가치가 없다. 성경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라 영적인 계시로 쓰여진 것이기에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나님을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영적인 이해와 성령의 체험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책을 읽고나니 무언가가 조금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내가 모두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시작할 것은 하나님의 영적세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차례다. 그것의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렇다. 성경에 대해 박식한 분에게 그 영적세계에 대해 자세히 배우는 것이다‘

나는 ‘성경공부‘를 본격적으로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했다. NASA 크리스천 모임을 본 이후 두번째 신앙적 도전을 받은 것이다.

성경공부를 결심했지만 어떻게 누구와 공부해야 할지 막막했다. 더구나 이 무렵 우리집에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방문해 삼위일체론 (성부 성자 성령)을 부정하며 기독교신앙을 공격했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에 대해 공박할 성경의 지식이 미흡함을 깨닫고 자신이 안타까웠다.

바로 그 주말, 같은 교회에 다니는 가정 (손영헌 씨 댁 . 후일에 창조과학교육관 설계자로 자원봉사 하게 됨)에 몇 집이 초대되어 갔는데, 나는 여러 가지 신앙적인 의문들을 여러 사람 앞에 내어 놓았다. 그때 믿음이 굳건하고 성경지식이 해박한 우종규 박사로부터 나는 새로운 성경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의사인 그분은 청년기부터 착실히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어서 나를 이끌어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이야기했던 내용에 대해 반박할 자료를 자세히 준비했다. 다시 만나기로 한 토요일, ‘삼위 일체론‘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결국 그 이단종교 신도는 자신이 더 알아가지고 오겠다고 간 뒤 두 번 다시 우리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날 밤에 모인 우리들 모두는 주말마다 모여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유학생과 한국인 부부 등 10여명이 모였다.

신앙이란 참으로 신비했다. 성경읽기와 공부에 몰입하면 믿음이 상승하는 것 같았다가도 조금만 소홀하면 성경이야기는 나와 상관이 없는 먼 이야기로 들렸다. 그것은 그때까지도 내게 ‘구원의 확신‘과 ‘영적인 거듭남‘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신 하나님의 손길은 점진적으로 내게 역사하고 계셨다. 우연히 ‘TIME’지를 샀는데 ‘우주의 기원‘이 특집 기사였다. 주제가 ‘대폭발생성론‘이었고 이에 대해 각 분야의 과학자들이 기고했다. 기본내용이 우주는 수십억 년 전에 고밀도의 덩어리 (원초원자)가 폭발했고, 다시 수소가 핵융합을 일으켜 태양계, 별, 지구가 생성되었다는 추측의 학설이었다.

‘그렇다면 그 원초원자는 어떻게 생겼단 말인가. 과학의 기본이치가 인과율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인데, 과학은 그 기원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내게 파도처럼 다가온 성경말씀이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였다. 이말 앞에는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할 필요성이 없었다. 나의 가슴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이것이 일 단계였다면, 이 단계는 우 박사가 ‘리더스다이제스트‘를 보여준 때였다. 그 책에는 ‘생물의 고고학적 기원‘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 있었고, ‘노아의 홍수‘ 사건을 훨씬 사실감 있게 입증하고 있었다. 나는 성서고고학에 관심을 갖고 구약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성서의 예언‘이 그렇게 정확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일일이 필기하며 신약성경과 대조했다.

‘1천5백여 년에 걸쳐 40여명의 선지자가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예언했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밝힌 그들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구약은 사람의 지혜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서로 잘 맞물리는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하나하나 의문들이 풀렸다. 새로운 것을 파고들수록 ‘진리‘는 먼저 다가와 있었다.

‘바로 1초 뒤의 일도 예측 못하는 것이 과학이다. 이것에 의지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나의 생각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더욱이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다니엘서 12장 4절이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그 오래 전에 오늘날 되어질 일을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었을까. NASA에서 최첨단 과학자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며 이 성경구절이 너무나 실감났다.

드디어 1975년 부활절을 앞두고 내 인생이 새롭게 거듭나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동안의 성경묵상과 과학지식 탐구는 ‘하나님께서는 살아 역사하신다‘는 결론을 얻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나약한지 의심과 믿음이 마치 시소놀이하듯 상황과 여건에 따라 달라지곤 했다.

1975년 3월말, 집 근처 슈퍼마킷 책방에서 핼린지가 지은 ‘지구의 해방‘이란 책을 구입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책 내용은 그동안 내가 느꼈던 여러 의문, 즉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예수께서는 왜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탄생하셔야 했으며 △인간의 죄는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왜 우리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롬 3 : 23) 그 죄값을 갚아야만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만족시킬 수 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만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주심(요 3 : 16)으로 그 구원을 완성시키셨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그 믿음으로 죄값을 청산하고 하 나님의 자녀가 된다‘

저녁식사도 잊어버린 채 자정까지 이 책을 다 읽었다. 한 마디로 그동안 내 눈에 덮여있던 비늘이 깨끗하게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십자가의 사건‘이 이토록 큰 비밀을 갖고 있었다니‥‥ 이때까지 단편적으로 들은 성경지식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논리와 이성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추어졌다.

마치 이리저리 흩어졌던 그림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았다.

진리를 깨닫고 그 해당자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여보, 난 이제야 좋으신 하나님을 만났소. 그분이 어떤 분인지 이제야 알았단 말이오‘ 나는 감격에 넘쳐 아내를 향해 부르짖었다. 그것은 기쁨과 환희의 외침이었다. 나와 아내는 밤늦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오랜 영적방황을 거쳐 비로소 나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중생의 체험을 한 것이다.

아침, 선명한 햇살이 창가로 스며들었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맑은 공기, 정원의 나무들, 푸른 하늘‥‥ 모두 어제의 것과 달랐다. 눈에 비치는 만물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포근함으로 다가왔다. 날아갈 것만 같았고 아무런 이유 없이 기쁨이 넘쳤다. 그 때서야 이해가 되었다. NASA 크리스천 모임에서 왜 많은 동료들이 그렇게 기쁨에 넘쳤던가를.

영적인 거듭남은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는 부부의 애정이 새롭게 회복되었다.

우리 부부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남으로써 물맛과 같은 덤덤한 가정생활이 향기 좋고 맛좋은 포도주로 변한 것이다.

감성적이고 다정다감한 아내와, 공학도로서 다소 무미건조하고 말이 뜸한 편인 나는, 같은 신앙 안에서 공동화제로 인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며 우리들의 삶의 목적·존재 가치가 그리스도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 덕분에 제2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는 애주가였던 내가 술을 끊은 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주도를 배운 나는 어디에서나 즐겨 술을 마셨다. 체질에도 잘 맞았거니와 음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집에 미니바를 차려 놓고 칵테일 책까지 구입해 즐겼다.

그런데 구원의 확신은 이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이 나를 변화시켰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신앙적 깨달음은 무엇이든 뒤로 미룰 수 없었다. 즉시 미니바의 양주 30여병을 모두 씽크대에 쏟아 부었다.

구원의 확신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동시에 모든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변화시켰다. 학자로서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던 내 인생의 태도도 긍정적으로 변했으며 용서와 이해, 사랑이 생활에 반영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감격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높임을 받는 것을 원하셨다. 나는 생각지도 않게 NASA에서 수여하는 ‘제1차 발명연구상‘을 받게 되었다. ‘특수합금조성 결정에 대한 공헌‘이 수상 이유였다. 그 우수한 두뇌집단 속에서 상을 받게 된 것은 결코 내가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알맞은 때와 장소에서 하나님이 지혜와 명철을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은 나의 삶 속에서 계속 이어졌다.

신앙이 바르게 자리 잡게 된 내가 성령체험을 하게 된 것은 신앙성장을 훨씬 가속화시켰다. 1975년 6월 ‘할렐루야 아줌마‘로 유명한 최자실 목사님이 클리블랜드로 집회를 하러 오시게 되었다. 원래 캐나다에 일정이 있었으나 스케줄이 변경 되는 바람에 갑자기 오신 것이다. 집회 전날 아는 집사님 댁에 최 목사께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집회 전야모임인 셈이었다.

최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성령충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나는 성령충만의 의미를 높은 수준의 믿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체험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박수를 치며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등 복음성가를 계속해서 불렸다. 최 목사님은 참석자 모두에게 일일이 안수기도를 해 주셨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해 주셨는지 방안 전체가 은혜의 열기로 후끈거렸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느낌과 아울러 온몸이 뜨거워졌다. 무어라고 표현하기 힘든 영적인 세계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느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나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었다.

성령이 바로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셨던 것이다.

성령체험까지 하게 된 나는 삶의 우선순위가 새롭게 결정되었다. 매사가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연결되었다.

NASA에서의 일은 연구 중심이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나의 연구를 구체적으로 활용하고 실용화할 수 있는 곳에서 근무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그런 곳이라면 세계에서 제일 큰 금속합금회사인 인코사였다. 그곳의 금속연구소 역시 세계 제일의 규모였다. 인코사는 뉴욕에 있었는데, 그곳 기술담당 부사장인 데카 박사가 우연히 NASA에 오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신기한 방법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셨다.

나는 데카 박사에게 인코사에 갈 의사가 있음을 밝히고 나의 연구내용을 설명했다.

‘김 박사, 나는 당신의 연구를 이미 잘 알고 있소. 그것보다 당신 종교는 무엇이오?‘

데카 박사는 엉뚱하게도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나도 크리스천이오. 뉴욕교회 성경공부 리더인데 다음 주에 내가 삼위일체론을 가르쳐야 하오. 어떻게 설명하야 할지 모르겠는데 당신이 아이디어를 좀 주겠소?‘

‘여호와의 증인‘ 때문에 우종규 박사에게 배웠던 삼위일체론이 생각났다.

‘물로 삼위일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물은 똑같은 성분이지만 얼었을 때는 고체, 물일 때는 액체, 수증기일 때는 기체입니다. 따라서 세분의 하시는 역할에 따라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생각할 수 있지요‘ 데카 박사는 놀란듯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리고 곧 인코사의 연구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내가 영주권이 없어 이민법상 정식발령을 받을 수 없는 어려움에 봉착했다. 나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인코사에서는 변호사를 세워 ‘김 박사가 비자문제로 한국으로 돌아가면 미국이 손해다‘란 탄원서를 만들어 많은 박사들의 사인을 받게 한 뒤 정식채용이 되게끔 도와주었다. 나와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성령 안에서 변화 받고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자 하나님께서 나머지를 책임지신 것이다.

NASA 기독모임회원들은 내가 인코사로 가게 된 것을 알고 몹시 섭섭해 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송별예배를 마련한 다음 모두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어디서나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뿌듯한 일이었다.

‘김 박사, 인코사에 가서 우리와 같은 성경공부모임을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동료들이 나와 작별악수를 나누며 이 말을 했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인코사에 온지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연구소장 비서인 틸리·오스 여사가 내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다.

‘김 박사는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군요‘

‘NASA에서 연구하고, 평소 오고싶어 하던 인코사에 왔는데 왜 기쁘지 않겠소‘

‘그게 전부예요‘

‘아니요. 실상 내가 기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셨기 때문이오‘

오스 여사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녀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인코사 내에 성경공부모임이 생기게 해달라고 25년째 기도로 준비해 오고 있었다. 우리는 뜻이 맞아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그리고 게시판에 광고를 써 붙였다.

‘매주 수요일 낮12시30분. 성경공부모임이 있음. 참석자 : 예수님, 김영길, 틸리·오스‘

성경공부모임은 금방 20여명이 되었다. 누군가가 먼저 시작을 못했을 따름이었다. 나는 이 모임에서 ‘통일교‘에 대한 비판 강의도 하며 열심히 모임을 이끌었다. 성경은 공부할수록 새로움이 더하는 진리의 보고였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더욱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또 한 번 나를 높여 주셨다. 제트엔진에 쓰이는 합금 MA 6000의 발견으로 ‘미국산업연구발명상‘(IR100)을 받았고, NASA의 ‘제2차발명연구상‘도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이럴수록 더욱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지는 것은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여겼다.

인코(INCO)연구소 근무 4년째인 1978년,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였다. 환경적으로는 무엇하나 불편한 것이 없었다.


  한참 의욕적이고 생산적인 연구활동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어느 정도 연구경험을 쌓은 후 언젠가는 귀국해야겠다는 평소의 생각이 기도 속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더구나 한국인은 우리밖에 없었기에 고국에 대한 향수도 있었고, 무엇보다 신앙을 모르는 부모와 형제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결정해야 할 지가 늘 기도제목이었다. 이 문제를 두고 우리 부부는 오래 기도해 오던 중 부흥집회 인도 차 한국에서 뉴욕으로 오신 L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미 소천하셨지만 우리는 그분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아직 영적으로 어려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이 부족하니 이 종을 통해서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먼저 기도했었다.

‘가라. 주저하지 말고 가라. 내가 네길을 예비해 놓았다. 네가 주저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내가 너를 통해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리라‘

목사님의 기도에 우리부부는 물론 함께 참석한 교우 L씨 부부도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우리를 생전 처음 만났기 때문에 우리 개인의 사정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 목사님도 자신의 기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2장 10절)

참으로 성령께서는 개인의 사정까지도 깊이 통찰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내 길을 예비해 주신다는 분명한 소신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다른 사명을 주시기 위한 섭리의 시작이기도 했다.

인코사에 사표를 제출했다. 소장은 깜짝 놀라며 극구 만류 했다. 향수병에 걸려 그런 것이라며 6개월간 휴직기간을 줄 터이니 한국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결심은 하나님의 뜻이니 번복할 수 없었다.

1978년 12월, 나는 12년간의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나는 한국과학기술원 (KAIST) 재료공학과 교수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다.

나는 과학단지 내의 교수아파트에서 생활했는데, 이곳에서 후일 ‘한국창조과학회‘를 만드는 창립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부터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1968년부터 조성된 홍릉의 과학단지는 처음엔 소규모였으나 정부가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꾸준히 초빙, 1978년에 이르러 3백여 명의 과학자들이 확보된 대규모단지로 바뀌었다. 이중에 적지 않은 수의 과학자가 크리스천이었다. 유학 중이나 현지에서 신앙을 갖게 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성경공부 모임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그 당시 연예인교회를 담당했던 하용조 목사님(온누리교회)이 성경공부를 지도했으며, 이곳에서 김해리(서울대), 송만석(연세대), 김정욱(서울대)교수 등 훌륭한 동역자를 만났다.

1980년 CCC(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세계복음화대성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이 프로그램 중 ‘창조냐 진화냐‘란 주제의 세미나가 있었다. 이 분야의 최고권위자인 헨리 모리스 박사(미국창조과학회 회장)와 기시 박사, 탁스턴 박사, 브래들리 박사 등이 ‘창조론‘을 증거하는 강좌가 있었다. 국내에서는 J교수가 강사로 선정됐으나 갑작스런 해외 출장으로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김 박사님, 해외강사가 네 사람이고 국내강사가 한 사람인 데, 차질을 빚고 말았습니다. 힘드시겠지만 한 강좌를 맡아 주십시오‘

당시 CCC 간사로 있으며 고대 화학과 대학원생이던 심영기 박사(화학연구소)가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창조과학은 내게 생소한 분야였다. 창조와 진화는 생명과학에 관련된 것이라고 느꼈고 평소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승낙했다. 전공도 아닌 생소한 분야의 강의를, 그것도 대집회에서 하겠다고 선뜻 나선 것은 지금 생각하면 엉뚱한 배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승낙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성령의 승낙이자 하나님의 인도였다.

‘좋소, 그 대신 창조론에 관련된 자료를 많이 갖다 주시오‘

심 박사는 즉시 외국에서 발간된 창조와 진화에 대한 관련 서적 10여 권을 보냈다. 이때가 행사 2주일 전이었다. 나는 이 책들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창조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성경말씀 (창세기 1장 1절)을 믿었지만, 과학적인 시각으로 어떻게 보느냐 하는 점에 대해 나 역시 분명한 해답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에 대해 창조과학서적들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줬다. 이것은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생물의 기원이 어디서 출발하느냐‘는 질문을 바탕으로 다윈의 진화론은 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내려왔다.

따라서 진화론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진리에 위배됐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진화론은 논리적인 학설이며 지극히 과학적인 반면, 창조론은 신앙적인 믿음에서 출발해야 하며 비과학적이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창조론에 관련된 서적을 읽으면서 판단한 것은 그 반대였다. 창조론이 얼마나 더 과학적인지 그 신비롭고 타당성 있는 진리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논쟁의 초점이 되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 ‘진화론‘은 우연하게 생겨나고 저절로 결합되어 점차 복잡한 구조로 변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모든 것이 진화를 거쳐 결국 고등 생물로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비과학적인 요소가 제기됐다. △확실하고 분명한 진화의 예가 없으며 △반쯤 발달된 형태의 생물이 과거로부터 보존되어 온 것이 없고 △화석에도 중간형태가 없으며 △현재도 진화가 증명되는 예가 없는 것 등이었다.

이 반면 ‘창조론‘은 연구할수록 창조과학의 신비와 과학적인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남은 일 주일동안 열심히 강의초록을 작성했다. 이것이 한국창조과학회를 설립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80년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CCC 대강당에서 열린 ‘창조냐 진화냐‘ 세미나는 연인원 4천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누구나 관심있는 분야인데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열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과학‘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과학은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얻어진 현상이나 원리를 검증하여 체계화된 지식을 제공합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 과학의 신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로 재고 저울로 다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존재이유나 도덕적 문제 등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과학적으로 보려는 시각 자체가 큰 무리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서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창조세계의 ‘약속된 질서‘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칙 속의 한 과목일 뿐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서론을 편 뒤 본격적으로 창조론이 진리이며 진화론이 허구임을 자세히 피력했다. 참석자들의 반응은 놀랍도록 컸다. 나는 강연 중에 힘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부르신 뜻이. 창조론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는 일을 하자‘

세미나에 같이 참여했던 20여명의 과학자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것이 태동이 되어 다음해 1월, 전경련회관에서 ‘한국창조과학회‘를 정식으로 창립하고 내가 회장을 맡았다.

‘과학자로서의 달란트를 하나님을 증거하며 창조의 사실을 근원적으로 밝히는데 사용하자‘

회원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학술세미나와 창조론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하시는 것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러므로 어렵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1982년, 하나님께서는 창조과학회를 밖으로 크게 알리는 계기를 만들어 주셨다. 내가 과학자로서 나의 전문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게 해주심으로 ‘창조론‘마저 권위가 붙게 하신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것은 전자반도체 ‘PMC1021’ 합금의 발견이었다. 온 매스컴이 떠들썩하게 보도하며 미국과 일본에까지 특허가 출원된 이 합금은 ‘우리나라 기술수출 제1호‘가 되어 나를 국민 훈장 동백장까지 받게 했다. 모든 분들이 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주는 만큼 내가 주도하는 창조과학회의 활동이 더 많이 알려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앞두고 언제나 지혜와 능력을 주셨다. 초내한강 ‘CAM1’을 발견, 세종문화상을 받게 된 것이나, 고강도 고인성 텅스텐 ‘W250’을 발견, ‘올해의 과학자상‘ 등을 받은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들이었다.

많은 곳에 강연 다니며 느낀 점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과학적 증거를 제시, 눈으로 보여주고 손에 쥐어 주길 원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분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과학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세계의 하나님은 물질세계의 눈으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재채기와 두통으로 감기를 인정하는 것은 증세 때문입니다. 그러나 감기를 일으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비밀과 창조의 법칙 속에서 보이진 않지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주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영적법칙의 시작입니다‘

여러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끊임없이 창조론 강연요청이 쇄도했다. 창조론 강연은 비신자에겐 도전과 충격을 주는 반면, 신자들에겐 믿음의 확신과 용기를 주었다.

강연을 하면서 나는 몇 명이 모이고 반응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 ‘창조론을 자꾸 외치고 전파하라‘ 는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늘 비슷한 내용을 강의하는데도 언제나 가슴이 뜨거워지고 기쁨과 확신이 솟아난다는 점이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할머니 몇 분을 모 시고 강연할 때나 큰 강당에서 수천 명에게 강연할 때나 똑같이 열변을 토했다.

각 대학의 축제 때마다 강연을 하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 생물교과서에서 ‘진화론‘만을 배운 대학생들을 차분히 이해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누구나 객관적으로 창조의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자연과학개론서‘가 있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창조과학회원 중 각 분야별 전공박사 20여명이 모여 종교적인 측면은 강조하지 않은 채 창조를 과학적 사실로만 설명하는 책을 만들기로 했다. 명지대학교 유상근 총장의 ‘그런 책 을 만들면 대학생들의 교양과목교재로 쓰겠다‘는 말씀이 큰 용기가 되었다.

각 교수들이 3년여를 집필하고 검토한 끝에 지난 90년 5월 ‘자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드디어 책이 발간되었다. 물질, 지구, 우주, 생명의 기원, 생명공학, 에너지 등 12개 주제로 5백 여 쪽으로 제작됐다.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펴는 방법이 참으로 다양함을 느끼게 된다.

한국창조과학회는 그동안 발전을 거듭, 회원이 1천여 명으로 늘었으며 이중 석사 이상의 과학자만 414명이다. 10여 권의 창조론서적이 출간되었고 2천 8백여 회의 세미나와 강연, 문서선교와 슬라이드로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있다.

1991년은 한국창조과학회가 설립된지 만 10년이 되는 해로 무엇인가 뜻깊은 사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었다. 이를 위해 꾸준히 기도해 오던 중 창조과학회 미주지부장 최인식 박사(재미의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한국에 창조론을 입증할 수 있는 자연과학박물관을 하나 세워보는 것이 어떻겠소. 설계는 이곳 재미 건축가인 손영헌 씨가 무료로 맡을 수 있소‘

순간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이라는 사실이 강하게 느껴졌다.

‘미국 NASA 시절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한국에서 창조과학회를 설립케 하신 하나님, 강연으로 또 책으로 당신의 섭리와 뜻을 전하게 인도하셨고, 이제 또 창조박물관 설립을 통해 새로운 사명을 주시는군요‘

이 박물관 건립이 내게 ‘분명한 사명‘으로 다가온 것은 세계에 무수히 많은 박물관이 있지만 창조론에 입각한 박물관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우는 것이 세계 최초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워낙 큰 사업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으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결정적일 때 나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언제나 성경구절이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장 13 절). 정말 하나닝이 명령하신 사업은 막히는 것이 없었다.

나와 창조과학회 임원들은 이 창조과학박물관 건립을 성경 창세기에 근거, 창조신앙 전파에 목적을 두자고 뜻을 같이 했다.

따라서 시대별로 되어 있는 기존의 유물진열방식에서 탈피, 노아관, 성막모형관, 생명과학관, 화석전시관, 환경보존관 등을 비롯, 옥외전시를 통해 누구나 창조의 신비와 자연의 조화를 깨달을 수 있도록 계획했다.

이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자 주위의 손길들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손영헌 씨는 2천평 규모의 박물관설계를 시작했고, 이를 보도한 국민일보를 본 정의숙 권사님은 경기도 용인의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근처 땅을 무상으로 제공하시겠다고 하셨다. 또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에 근무하는 유명한 화석복제가 팀 리들 씨(부인이 한국 사람)는 한국에 창조과학박물관이 생길 경우 자신이 화석복제를 맡아 주겠다고 나셨다. 화석진품은 워낙 가격이 비싼 데다 구하기도 힘들어 비용이 적게 드는 복제품이 박물관에 꼭 필요한 실정이었다. 또 국내 박물관설비업체인 대성사에서도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해 초기작업이 어렵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공사비와 내부시설비 및 화석·유물구입에 소요될 약 2백 50억원의 자금이다.

그러나 나와 임원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듯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널리 펴는 일에는 언제나 놀라우신 방법으로 역사해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처음 계획은 작은 박물관을 하나 짓는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더 큰 꿈과 비전을 주셨다. 역대 과학자들의 신앙과 업적을 밝히는 전시관과 야외공원조성 등을 통해 크리스천들의 휴식공간까지 만들 예정이다. 머지 않아 창조과학박물관을 짓는 힘찬 망치소리가 울려 퍼지리라 기대한다.

유명한 과학자 아인시타인 박사는 죽기 전 ‘신앙이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진리의 세계는 반쪽밖에 되지 못한다는 설명이다. 지구만 해도 수백만 종의 동·식물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창조의 세계‘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자연이란 책에서 읽어 보십시오‘라고 전도하곤 한다.

나의 삶은 1975년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모든 가치관과 목적이 바뀌었다.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참 기쁨과 평안,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게 되 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듯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마땅히 알고 섬겨야 하는 ‘당위‘의 차원인 것이다. 아울러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인격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타종교와 달리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느냐 멸망하느냐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나를 안위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로서 내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

나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할렐루야‘를 인사처럼 건넨다.

그래서 먼 훗날 김영길 박사로 기억되기보다는 ‘할렐루야 아저씨‘로 기억되길 원한다. 할렐루야 !

(출처 : '열리는 영의 세계'(1991년 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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