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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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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김희철 강도사 [생명의교회(십자가 선교회)]

부모와의 만남

1957년 1월 12일 나는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의 삶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그 당시는 물을 길어다 먹어야 했고.
나를 임신하신 어머니는 물을 길으시기위해 겨울 눈길을 나서야 했고, 물을 길어 오시는 도중 그만 넘어지심으로 나는 9달 몄일 만에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도 탯줄을 목에 감고 태어났다고 어머니에게 들었습니다. 얼마전 딕 호잇과 아들 릭의 이야기를 컴퓨터를 통해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릭은 탯줄이 목에 감김으로 뇌에 산소호홉이 중단되어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가 와서 아버지 딕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자라면서 잔병은 많이 치뤘지만 건강하게 잘 자랐습니다. 부모님의 기도와 보살핌으로 말입니다.

형제관계는 배다른 누이와 3명의 여동생, 그리고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는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님과의 잦은 만남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시는 분들이셨기에 새벽에 나가시고 밤이 늦어야 돌아오셨기 때문에 늦은 밤에나 졸리운 눈을 비비며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라면서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학교에서 배가 아프기 시작했던 나는 그냥 먹은 것이 체한 줄알고 방과 후 까지 참고 견디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은 실신을 했고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는데 결과는 급성맹장이었고 맹장이 터져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온 날 막내인 남동생이 크림빵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고 나는 같이 놀아 준다는 명목으로 크림빵을 반을 양도 받았습니다. 그리곤 놀아 달라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사실 맹장수술한 자리에 심지를 박아놓았기에 거동이 많이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통원치료를 받고 있던 때라 제가 병원을 갖었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나를 기다리다 여동생들이 학교에 마치고 돌아오자, 동생들과 같이 남산으로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산 도서관앞에서 달려오는 짚차에 의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초등학교 3년인 쌍둥이 여동생은 차가 질주하자 동생의 손을 놓고 도망을 했지만 5살인 동생은 그만 ....너무 슬펐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잊혀졌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날....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술을 배웠습니다. 인정이 많으시고 자상하신 아버지 하지만 아버님은 하루도 술 마시지 않으신 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늘 취해계신 아버지 결국은 술과 도박으로 많은 것을 잃으셨고 술로인해 돌아가셔야만 했습니다. 쓸쓸하게 ....

고등학교시절부터 담배, 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몄번이나 학교를 퇴학당할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간절한 간청으로 어렵게 학교를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명동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음악다방 D.J 와 술집 기도생활 참으로 어두운 생활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명동생활 3년 만인 22살에 한 여자를 만났고,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외한은행에 근무하던 여자는 명동생활을 청산할 것을 요구했고 저는 그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 교제를 끊겠다는 자신의 입장을 내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양가 집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아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몸에 배인 생활이 나를 많이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중 딸아이를 낳고 78년 9월 결혼을 하게 되었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부정한 방법이지만 본봉이 12만 8천원이었던 그때, 부수입은 매주 100만원 정도를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그 회사는 지금은 동양그룹으로 넘어간 회사이지만 그 때만해도 아버님의 사촌형이 제일교포 김윤호씨가 경영하셨던 한국 고-킹이라는 회사였습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서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나고 낮에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근무시간중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면 남영동이나, 영등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다니던 회사가 동양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직장을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보아온 장사길로 들어섰던 겁니다. 어머니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용산 도매시장에서 도매장사를 시작했지만 장사를 하면서도 술을 놓을 수 없게 되었다. 손님과 거래를 하면서도 술이 없으면 안될 정도였다. 그러면서 도박에 빠지게 되었던 것 같다.

술을 깨고 집에 들어가려다 보니 장사를 마치는 오전 11시나 12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호텔 빠징고를 찾게 되었고, 돈을 털어 넣는 것은 장난이 아니게 되었다. 술 도박, 결국 전셋집마져 빼서 없애고 갈 곳이 없게 된 나는 아내와 2살난 딸을 데리고 밤
기차를 탔고, 강원도 황지로 내려가 광부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열심히 일을해서 많은 사람들로 인정은 받았지만 술, 화투 그것들로 인해 온전해 질 수는 없었습니다. 한달에 많이 출근해야 15일정도 6개월을 일하면서 선산부로 올라가면서 약간의 돈은 더 받을 수 있었지만 술값을 충당하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81년 4월에 아들을 낳았고 그해 7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60세 이신데, 너무도 오랜 동안 술과 도박생활로 인해 망가지셨고, 집안이 무척 어려웠기 때문에 돌봐주실 분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서 쓸쓸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권사이신 큰 어머니께서 잠시 들르셨다 아버님의 소천을 지켜 보았다고 하셨습니다(어머니는 장사하시러 나가심).

돌아가시면서 하신 말씀은 희철이가 아들을 낳았다는데 꼭 한번 보고 싶었다 하셨고, 찬송가 455장을 불러 달라셔서 찬송을 다 듣고 나셔서 눈을 감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버님을 보내셨습니다. 아무것도 해 드린 것도 없었는데, 서울로 올라와 장례를 치룬 후 황지의 살림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다시 장사를 시작했지만 술로 인해 무엇이든 온전히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 부터인가 저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통사고로 죽은 막내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놀아만 주었어도.... 약속을 지키기만 했어도 동생은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그 죄책감으로 인해 더 많은 술로 내 삶을 지워 버렸습니다.

그런 과정에도 어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많은 것으로 도와 주셨지만 변해지지 않는 자식을 보며 미국으로 떠날 것을 결심하셨고, 아들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1990 년 미국 딸에게로 떠나 가셨습니다. 그때부터 더 많은 술과 아내에 대한 구타 등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갔습니다.

결국 아내는 1992년 7월 7번째 가출로 아이들과 내 곁에서 영영 떠가갔습니다.
모두가 떠나버리고 난 뒤 점점 더 중독으로 이어졌고, 그 때부터는 내 삶의 전부는 술이었던 것 같다. 술이 없이는 생활할 수 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던 겁니다.

어머니 아내 형제들 친구들 주위에 모두가 떠난 내 삶은 아무런 희망도 빛도 없었습니다.
딸은 딸 친구의 집으로 가서 학교를 다니며 생활했고, 아들은 내 손에서 형편없는 모습으로 자라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불량청소년으로 보호시설 생활 등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해 갔습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방법이 있을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 던 어느날 아들이 거리에서 돈을 빼았은 노상강도로 구속되었고 인천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절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파트 3층 난간에서 술에 취해 몸을 던졌으나 다리만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정말 죽지도 죽을 수도 없는 처절한 생활 중 살고 있던 집이 헐리게 되면서 임대 아파트에 입주 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고.... 친구의 도움으로 계약을 했지만 500만원의 돈이 없어 입주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어머니는 이것이 마지막도움이라면서 돈을 보내 주셔서 입주하여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다시 아들의 범죄와 아빠의 술,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살아야만 했는지....?

다시 아들은 김천 소년교도소에 아들에게 면회를 가기 위해 장사를 했지만 날마다 술에 취해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으로 들어가야 했고, 급기야 장사는 고사하고 갚아야 할 돈이 엄청날 정도로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장사 마져 포기하고 이제는 술을 마시기 위해 병원 장례식장 으로 거리로 헤메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한 병 술을 마시기 위해 지하철입구에서 손을 벌리던 모습 이렇게 살아 무엇하냐는 강한 마음의 물음에도 이렇게라고 살아야겠다던 내 마음 내 자신이 말할 수 없이 미웠고 죽이고 싶었습니다.

언제가는 김천 교도소에 면회를 가서 술에 취해 면회를 하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 면회실에서 하루를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면회를 하고 돌아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 비참함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마셔대던 내 모습 ....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를 사채에 담보로 잡히면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아파트 계약서를 들고 찾아간 사무실 그곳에서 쉽게 300만원을 빌리게 되었고, 나는 좋은 조건에서 마실 수 있게 되었지마 한 달이 못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원금은 커녕 이자 마져도 불가능한 것은 뻔한 결과지만 이런 몸으로 밖으로 나가서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 였다. 기다리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미국 어머니에게 사정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95년 7월 한국에 나오셔서 아들이 술을 마시려고 잡힌 집을 ?O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300만원을 빌어 썼는데 이자까지 500이 넘었고, 어머니는 가지고 나온 돈이 부족하자 친구분에게 100만원을 빌려 집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친구 분의 돈을 갚고 가셔야 한다며, 8월의 뜨거운 뙤약볕에서 교문리 근교에 파밭을 매는 작업을 나가셨던 겁니다. 40일 동안 한국에 나오셔서 한달을 아침 6시부터 저녁 7시까지 아들의 집을 찾아 주시기 위해 뜨거운 뙤약볕에서 일을 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희철아 내일 이면 미국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부탁이 있다, 오늘 하루만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한다. 꼭 네가 단 하루라도 술을 안마신 모습을 보고 헤여지고 싶구나 ....

나는 속으로 그래 단 하루 어머니의 소원인데 ... 꼭 들어 드리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을 하고 한 10분 정도 지나자 입술이 타오면서 나는 밖으로 발길을 옮겨 집 앞 포장마차로 들어가 술을 한병을 시켰고, 한잔을 따라 마시고, 남은 한잔을 따랐습니다.

그때 포장마차 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보는 눈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 보았을 때 눈물을 흘리며 서 계신 어머니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남은 술을 들어 마시던 내 모습...
이것이 과연 인간의 모습일 수 있을까?

어머니는 가셨다 다시는 너를 찾지 않겠다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
아들이 나왔고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없었습니다. 눈을 뜨면 술 마시다 쓰러지고 또 마셔대고, 이 가게 저 가게 술을 얻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집 앞에서 5분 정도 나가면 월계역 동냥을 한다 한병 술을 마시기 위해. 수치스럽고 비참하지만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동냥을 한다.

밤 늦은 시간 깨끗이 씻고 병원 영안실을 찾는다 마셔야 되니까. 이렇게 살아 무엇을 할까?
98년 3월 밤 늦은 시간 면도칼을 하나 샀다. 이불을 깔고 누워 팔목을 그렸다. ?K아지는 피 .... 이렇게 끝날 것을 웃음이 나온다. .....

다시 얻은 삶
중환자실에서 눈을 떴고, 나를 찾아온 공릉교회 목사님과, 여자 전도사님 술을 마시기 위해 등록했던 교회였었는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고, 병원비를 해결 해 주셨다.

퇴원과 동시 병원 앞 가게에서 한 푼의 돈도 없이 다시 잡은 술병.....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말한다 이제 정말 멀리 떠나야 겠다고, 그리고 짐을 챙긴다. 그 때 아들이 나에게 들려준 한마디 말,

“아빠! 경기도 가평에가면 십자가 선교회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목사님이 알코올 중독자들과 생활하고 있대요.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술을 끊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 아빠도 한번 가보시지 않을래요”

한 마디 말이 마음 가운데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술을 끊는데요”그래 이미 죽은 사람 아닌가 만나보자 가보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 아들의 손에 끌려 1998년 11월 15일 서울 성북구 삼선동에 위치한 십자가 쉼터를 찾았고, 다음 날 경기도 가평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닌지...

16일 밤 늦게 도착한 가평 선교회 이런 곳이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라했고, 냄새는 코를 찔렀습니다. 주위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시체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혼자말로 잘못왔다. 내일 날이 밝으면 걸어서라도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밤새 뒤척입니다.

새벽녘에 내 귀에 들려운 찬양 아름다웠다 하지만 떠나야 겠다는 마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어느 여 전도사님이 안내로 예배당에 들어가 찬양과 예배를 드렸지만 목사님의 설교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출입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산등성이 사이로 솟아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고, 그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마치 진주를 엮은 것같이 아름답게 내 얼굴을 향해 비춰지면서 이상한 현상이 바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머리 속에 가지고 있던 아니 마음 속 깊이 담아 놓았던 생각들이 바뀌어져 버렸던 겁니다. 어제 밤에 시체 같이 보였던 그들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보이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 견딜 수 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음도 바뀌어져 이 곳(선교회)에서 생활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예배는 내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좋았습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감격이 있고, 감사가 그리고 기쁨이 마음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한달이 지난 11월 27일 목사님께서 미국집회를 떠나시기 전 드려지는 예배와 안수를 통해 방언을 선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 이런 부탁을 드렸습니다.

“주님! 주님을 만나니까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이렇게 세상을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모에게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주위에 많은 이들에게 왜 고통을 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는지요, 지금도 저 밖에는 나와 같이 술로 인해 가족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답니다. 제가 주님을 그들에게 소개하면 안될까요?....”

그러면서 성경을 쓰기 시작했고, 성경을 쓰는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내 마음에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평안이 오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성경을 써 내려갔습니다. 시간만 나면 밤을 거의 세워가면서 3달이 조금 지나 성경을 다 써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것으로 봉사를 시작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성령충만한 생활의 모범답안이 아닐까 합니다).

선교회생활 보름이 지난 어느날부터 주방을 맡아 형제들의 식사를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외아들로 자라 부엌일이란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는데 많이 해본 것처럼 쉽게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했고 내가 만든 음식을 통해 형제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건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 영성교육을 채 마치지도 못한 어느날 서울 쉼터에 주방에 문제가 생겼고, 목사님께서는 저를 서울 쉼터 주방보조로 가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쉼터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자 제가 가장먼저 한 일은 기도처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사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음침한 지하실을 청소하기 시작했고 깨끗이 치운후 조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리곤 다음날부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새벽3시30분에 일어나 주방에 들어가서 쌀을 씻어 올려놓고 반찬을 준비하고 국을 올려 놓습니다. 그리고 밥불을 켜고 국을 약한 불로 올려 놓고 지하실로 내려가 기도를 시작합니다.

보통 4시부터 5시30까지 기도를 하고 올라와 보면 밥도 국도 다 되어있었습니다. 조금도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하나님과 아름다운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곤 5시30분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를 마치면 아침식사를 시작했고, 형제들은 모두 일터로 나가곤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날 목사님으로부터 신학을 권유받고 얼마나 기뻐했는지....그러면서 마음에 갈등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선교회에 갈 때 술을 마시기 위해 사채에 저당잡힌 임대 아파트와 이제는 술을 끊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술로 인해 아이들에게(당시 아들은 19세, 딸은22세)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고 아빠 노릇도 못했는데 그리고 일을 해서 저당잡힌 집을 ?O아 주어야 아이들이 살아갈 텐데 ...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에 확신이 다가왔습니다.
그 확신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마음에 평안으로 다가왔던 겁니다.
마음에 결정을 내리고 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용서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들여 내 마음을 한자 한자 써 내려갔답니다.

편지를 읽은 딸의 답은 “제가 어릴때 보았던 아빠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이제는 아빠의 남은 인생 아빠가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하며 살아! 아빠! 사랑해...“
짧지만 이 편지를 읽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답니다.

열심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편지 한통을 받게 되었답니다. 그 편지의 내용에서 저는 제 딸아이가 제가 저당잡힌 임대 아파트를 법원을 통해 찾아 놓고, 동생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답니다.

나를 용서한 딸은 자신이 모아놓은 돈과 친구에게 돈을 빌어 집을 찾아 놓고 동생을 보살피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집을 찾아가 보게 되었고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선교회와 쉼터생활 약5개월 만에 들려본 집 아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하심에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1999년 3월 신학교에 들어갔고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게으름을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하심을 맛본 내게 게으르고 나태해진다는 것은 곧 범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또 은혜를 베푸셔서 2001년 1월 CEC English 캠프를 통해 미국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의 27일 동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안 목사님의 도움으로 미주 복음방송 “새롭게 하소서”를 통해 지난 날의 삶을 간증할 수 있었고, 간증을 통하여 어머니가 계신 미국이지만 변화된 아들의 모습을 보일 수 없음을 알렸고, 이러한 삶으로 인도해 주신 에벤 에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답니다.

결과 폴로리다에 계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는 비행기 티겟이 목사님으로부터 전해졌고 6년 만에 중독자인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미국으로 들어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났습니다. 어머니와는 6년 만에, 동생은 약12년 정도 된 것 같았습니다. 나를 바로보는 어머니와 동생의 눈길 그들은 나를 믿지 못했습니다. 제가 정말 술을 멀리하고 있는 것인가가 의심스러웠던 겁니다.

복음방송을 통해 전했던 간증 테이프를 건네 주었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보낸 이박 삼일 짧은 시간을 마치고 우리는 헤여져야만 했습니다. 나는 다시 L A로 돌아와 팀과 합류했고, 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한동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 기도했고 온전한 모습의 내가 되길 원했습니다.

신학교 3년 때에 같이 공부하던 분의 동생을 소개 받게 되었고, 같이 기도하면서 결혼의 문제를 논하게 되었습니다. 100일 철야 기도를 통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답니다. 그리고 그날 바로 영적인 아버님이신 안목사님을 찾아 허락을 받았고, 우린 2001년 12월 15일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안일권목사님의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신혼은 조금은 남달랐습니다. 저는 쉼터라는 공동체에서 숙식을 해야 했기에 기약없이 드나드는 신접 살림이지만 조금도 이상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역을 이해해 주는 아내가 무척이나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작은 일이라고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도 말입니다.

신학교를 마치고 신대원을 공부하면서도 쉼터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주어진 일들을 게을리 하고 싶지도 않았고 늘 내가 서야 할 .... 그리고 있어야 할 곳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에게 조금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으며 늘 웃음으로 대해준 아내가 고마웠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집에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행복했습니다.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가를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대학교 1학년이던 딸(유나)와 도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답니다.

유나는 너무 예쁘고 착했습니다. 많은 것을 이해해 주었고 특히 엄마의 삶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던 차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아빠를 주셔서 감사하단 말을 듣고는 더 많이 감사했답니다. 하나님 이런 좋은 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믿음 안에서 성장한 유나는 신앙이 두터워 항상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기에 우리는 좀 더 펀안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졸업을 해서 학원 논술 강사로 나가지만 대학때는 교사로 봉사했고, 지금은 간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늘 하나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유나의 모습을 보면서 저의 두 아이들도 유나와 같았으면 하는 바램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2006년 신대원을 졸업하던 시기에 맞추어 미국에 계신 어머님이 나오셔서 졸업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나의 남은 삶은 하나님의 종이된 아들이 있는 이곳 한국에서 보내다 마치고 싶다고....

올해 81살이신 노모의 간절한 소망이 바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품에서 하나님 나라로 가고 싶은 것이 소원이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쾌히 승낙했고, 어머니는 2006년 9월 17일 한국으로 나와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십니다. 이러한 일을 많은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얼만전(2006,5.1) 사역지를 서울 쉼터에서 강원도 횡성으로 옮기게 되었고, 다시 한번 사역의 뚜렷한 목적을 갖게 되었답니다. 지극히 작은 자...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나의 일을 아니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말입니다.

치유하고 싸매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회복 시키시고 만나주신 확실한 뜻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로 주님과의 만남 가운데 제가 했던 그 기도의 제목을 주님은 실행 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을 소개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던” 나의 기도제목을 말입니다.

계획하신 삶 가운데 새로이 가정을 허락해 주셨고, 자녀들과의 관계 또한 회복 시켜주시며, 멀리 떠난 노모를 모실 수 있도록 계획하신 하나님은 당신과의 약속의 이행을 위해 나의 모든 어려운 일들을 손수 시행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를 알기에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늘 사랑과 두려움으로 제 곁에 다가 온 답니다. 감사할 뿐이며, 무어라 말해야 그 고마움을 표하겠습니까?
그냥 주어진 일에 감사와 기쁨으로 해야 함에도 때로는 불평, 불만이 제 마음 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직도 부족한 저에게 하나님께서는 2006년10월 9일 강도사 라는 직분 인허를 허락하셨고 더 많은 일들을 요구하셨습니다. 순복할 뿐이며 최선을 다해 그 사랑을 증거할 것이라 다짐해 봅니다.

요사이 한 주에 한 번 집에 내려와 하루 쉬는 날을 기다리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떨어져 사셨던 날들을 잊으셨는지 일주일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는 어머니의 그 말씀이 왜 내 마음에는 아픔으로 다가오는지 말입니다.

그것은 이렇게 사랑했던 아들과 떨어져 살도록 만들었던 지난 날의 나의 잘못이 다시금 생각이 나서랍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 우리의 가정안에 있기에 다시는 그런 슬픔을 재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딸과 아들, 지금도 많은 말썽의 대상이 되는 아들 광호(26)이 아들의 반복되는 잘못들을 보면서 내가 지난 날 저지렀던 잘못들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얼마전 9월초 제 사역지인 십자가 선교회에 3개월 프로그램을 참여 시켰고, 수료를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서지 않은 아이의 마음을 봅니다. 제가 아이에게 준 마음의 수많은 상처들 그것을 어찌 내 생각으로 회복시킬 수 있겠는지요.

우리 가족은 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결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는 것을 저희 가족은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사랑하심과 계획하심 그 때를 저희는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식탁에 둘러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 기도로 우리의 모든 사랑을 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광호도 얼마 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지나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서는 그 날을 허락하심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주님과 동행했던 9년 더 없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가는 그 길도 행복할 겁니다. 그 분이 계시기에..... 물론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지 않으면 봄이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답니다.

주어진 사역 그들과의 생활 이것이 나의 삶의 전부이며 행복의 전제 조건임을 이제는 깨달았답니다. 예수님 께서는 제자의 조건으로 십자가를 지라 하셨습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진정한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고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제는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저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삶을 나 자신을 온전히 내려 놓고 내 생각을 그 분의 생각에 항상 순종하며 복종하는 인도함 받는 삶으로 그 분 곁에 영원토록 아름다움으로 남는 삶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망임을 고백하면서 이만 글을 접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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