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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사랑하면 할수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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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간증문은, 이춘형 목사님이 에 보내오신 자녀분의 신앙생활 체험수기로, 중,고등학교 수험생들에게 큰 은혜가 될 것 같아 세 차례로 나누어 올립니다. 은혜의 글을 보내주신 이춘형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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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이가은 자매(대현교회, 주교사, 찬양/율동, 반주)

나는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아토피를 앓았던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고 계신 중에 임신 사실을 모른 채 독하다는 피부병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하셨다고 한다. 후에 병원을 찾았을 때엔 기형아가 나올 것이라며 낙태 권유를 받으셨다. 부모님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굳게 먹고 나를 나으셨다고 정상적인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감사하시면서 나의 이름을 ‘加 恩’이라고 지으셨다. 부모님은 아직도 나에게 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아이’ 라고 하신다.

    나는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흔히 교회라 하면 대형교회를 떠올리기에 목회자 자녀는 세상물정 모르고 깨끗한 곳에서 귀하게 자랐을 것을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지방에서 지하 교회를 개척하신 부모님은 재정적으로 여유로울 날이 없었다. 아이들 다 가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다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맞고 따돌림 당하는 오빠를 본 부모님께서는 마음이 아파 한 달 남짓 유치원을 보내셨다.

후에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와서 오빠는 한글이라고는 읽지도 못 하고 달랑 자신의 이름만 그릴 줄 아는 채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두 살 아래의 나는 그 자랑스럽던 오빠의 유치원 가방을 들고는 동네 유치원에 매일 놀러갔다. 다른 유치원의 가방을 들고 와서는 놀이터에서 놀다만 가는 나를 안쓰럽게 본 유치원 원장님께서 무료로 유치원을 다니게 해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는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가정이 지극히 어려운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키우시고 입히셔서 후회 없이 많은 것을 하며 자랐다. 내 나이 또래 여자 아이라면 누구든 꿈꿨을 피아노학원을 다닐 수 있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교과에서 다뤘던 영어를 일곱 살 때 외국인 회화학원을 통해 접했다. 또 초등학교에 가서는 바이올린, 동요학원, 서예학원, 속셈학원 등 감히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졌다.

    이름 석 자도 모르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우리 오빠는 고학년이 될 수록 공부를 무척 잘 했고 6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반에서 10등 남짓 했던 나는 비교의식을 갖게 되었고 중학교 때에 전교 3등을 하던 때까지도 알 수 없는 상처를 갖고 있었다. 부모님의 사랑 속에서도 조부모님, 친척들이 오빠에게 갖는 큰 관심과 사랑이 나로 하여금 오빠를 미워하게 만들었다. 오빠와 나는 앙숙이었다. 그러나 오빠가 고등학교를 집에서 멀리 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오빠가 전액 장학금으로 3년을 책임져 줄 학교의 시험을 치르고, 뽑혀서 기숙사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재정적인 문제의 해결로도 좋았고 오빠를 안 봐도 되니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오빠가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너무 외로웠다. 깨달은 바가 있다면 내가 미워했던 것은 오빠가 아니라 나를 비하하고 오빠를 미워하려 하는 나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오빠를 좋아라했던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 또한 오빠가 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높은 경쟁률로 인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익산고등학교’ 합격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이라도 된 것 마냥 기뻐했고 만족했다. 고등학교에서도 오빠는 여전히 공부를 잘했다. 그렇지만 나는 더 이상 오빠를, 나를 미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를 놓친 채로 즐겁게 놀았다. 시험을 통해 뽑힌 아이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학업에 대한 경쟁과 스트레스가 심했던 우리 반에서 나는 늘 꼴찌를 하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즐기며 살았다.

오빠는 내가 1학년을 마친 후에 고려대에 입학했고 그런 오빠를 보며 ‘내가 지금 공부를 안 해서 그러지 나도 하면 금방 갈 수 있을껴!’ 생각했고 태평한 나날을 보냈다. 오빠가 없는 한 해를 보내고 2학년 2학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공부를 안 해놓긴 했지만 나의 점수를 보아하니 노력해서 올릴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꿈은 클 대로 키워놓아 고대에서의 대학생활을 친숙하게 여기면서 점수는 400점 만점에 260-70점이었으니 초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2학년 2학기 겨울방학이 되었고, 학교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서울에 올라와 강북의 J학원 겨울방학 수능다지기 프로그램에 임했다. 2년 동안 놀아왔던 나에게 하루 종일 꽉 짜여있는 수업과 자습시간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나름대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준비했고 자습시간에도 취약한 과목을 중심으로 짠 계획에 맞춰 열심히 공부했다. 5일 내내 학원 수업, 학사의 자습에 치이다가 주말이면 2-3시간의 자유 시간을 줬는데 그 때마다 아이들은 가고 싶은 대학을 둘러보곤 했다. 나는 고대에 가고 싶어 했고 나의 친한 친구는 이대에 가고 싶어 했다. 우리가 머물던 곳이 아현동이었고 지하철 타는 것이 걱정이 되어서  한 정거장 차이인 이대로 나들이를 갔다. 나의 억지스러운 목표는 언제나 고려대였고, 여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대학에 와보는 것만으로도 예비 고3에게는 큰 도전이 되었다.

길고도 짧았던 겨울방학이 끝나고 우리는 고3이 되어 익산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3학년 첫 모의고사를 치렀다. 310점, 점수가 오른 듯 했으나 500점 만점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에 결국 향상되지 않았다. 사실 1,2학년 때까지 내가 마음껏 놀 수 있었던 것은 열심히 공부하면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인한 것이었는데 열심을 부린 후에 얻은 결과를 보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열심히 해도 오르지 않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나.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를 스쳐지나가던 중 갑자기 하나님이 떠올랐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했던가. 하나님은 만물의 주시라 했다. 마음이 가난해진 상태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은 더 크고 영화로워 보였고 나는 그런  하나님을 붙잡기로 했다. 아니 그런 하나님께 잘 보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고3이 되어 마음이 조급해지자 아이들은 슬슬 고3 핑계를 대며 교회 다니기를 쉬거나 교회를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출석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학교도 주일 아침에 있던 자유 시간을 자습시간으로 바뀌었고, 그 시간에 교회를 가는 것은 손해로 밖에 보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잘 보여야겠다는, 어쩌면 약은 생각으로 30분 걸리는 우리 교회에 여전히 나갔다. 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주일학교 교사를 맡았다.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단했다. 담임선생님, 친구들,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안하던 봉사를 고3 되니까 하냐면서 걱정스런 맘으로 나를 다그치셨다. 처음에는 나조차도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차라리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그 시간에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일 예배와 주일 봉사가 너무나 귀하게 다가왔다. 특히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그동안 무겁고 찌든 나의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주일이 기다려졌고 하나님을 원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그분께서 역사하심을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놀기 좋아하고 공부를 못 하는 것은 선생님들, 우리 반 아이들, 후배, 졸업한 선배님들, 그리고 나마저 익히 아는 것이었기에 이런 내가 성적이 오른다면 그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를 써달라고, 내가 당신께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늦잠꾸러기에 게으름뱅이였던 내가 새벽 5시만 되면 눈이 떠졌고 그런 하루는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시작되었다. 씻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오늘 하루를 부탁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으며 공부 하고자 하는 욕구와 의지가 생겼다. 많은 분들이 겪어봐서 알겠지만 공부해야하는 것을 안다고 해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과 몸을 허락하신 것이다. 자습시간, 점심시간, 쉬는 시간에도 철저히 공부했다. 공부가 너무 즐거웠고 기뻤다. 공부하다가 피곤하거나 문제가 잘 안 풀리면 늘 가지고 다니던 성경책을 펴서 읽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맘 놓고 다닐 수도 없고, 과외를 받을 수도 없습니다. 영양제도 없고 보약도 먹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지혜의 근원되시고 만물의 주인 당신께서 저의 과외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제 힘이 되어주세요.”

  가장 먼저 기숙사를 나와서 가장 나중에 기숙사를 들어가는 나의 발걸음은 너무나 가볍고 행복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공부는 정말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다. 나의 하루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길고 깊이가 있었다. 나의 달라진 모습에 반 친구들, 선생님들, 후배들도 놀랐다.

나의 하루하루가 변화하는 동안 나의 주변 또한 달라져있었다. 흔히 고3이 되면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혹은 공부하는 것을 자랑삼기 위해 소지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주황색 고무 귀마개, 책 받침대, 방석, 뿔테 안경 등등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의 친구들, 혹은 후배들 사이에서 자습할 때 성경책을 두고 보는 것이 유행이 된 것이다. 나는 정말 너무너무 감사했다. 그 아이들이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보는 여부를 떠나서 공부하기 앞서 성경을 묵상하는 행동을 통해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인정받는 것 같았다. 그 때에 나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당신께 영광을 돌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감사했고 만족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여전히 공부를 즐거워하였으나 성적은 그리 잘 오르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나는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내가 2년을 놀았기에 당연한 것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어찌됐든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낙망하지 않고 다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언제나 이 말씀을 붙잡았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시 118:6) 나는 종종 여기서 사람을 시험으로 고쳐서 읽었으나 이 말씀의 숨은 뜻과 그 역사하심에 대해서는 이제야 느끼게 된다. 사실 공부할 때 가장 지치는 것은 자신의 낙담 뿐 아니라 타인의 시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불구하고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비아냥거림을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로 놀랍게도 나는 다른 이의 시선이 보이지 않았다. 나의 성격상 다른 사람의 시선과 말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험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위 말씀을 통해 나를 보호하셨음을 말한다.

  또한 나에게는 엄청난 후원자들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 디데이 때 꽃다발, 초콜렛, 금목걸이 등 화려하고 아름다운 선물들을 받았지만 나는 오빠에게서 자그마한 일기장을 받았다. 오빠는 일기장 각 장마다 말씀이 적어줬고 매일 새벽 나를 위해 기도했다. 또 우리 부모님도 매일 새벽에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나는 세상 그 어떤 부요한 선물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귀한 사람을 주신 것에 감사했다.
   
    고3이란 이름으로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풀 만한 것이 필요했다.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했고 여자아이들은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봤다. 물론 나는 힘이 들지 않았을 뿐더러 주일마다 재충전을 하고 왔기에 아이들의 휴식 시간마저도 철저히 공부했다. 언젠가 한 번은 고민을 하다가 2 시간짜리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내가 고3 때 본 유일한 영화였다. 이런 계산은 뭔가 냉정한 것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그 아이들 노는 시간이 내가 교회에서 섬기는 시간보다 더 많았다. 즉,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에도 결국 나는 손해가 없었던 것이다.

  여름방학이 되어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학기 중보다 나의 시간이 많아졌기에 훨씬 더 능률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 즐겁고 기쁘게 방학을 보냈고 성적은 10-20점 정도가 올라 있었다. 이번 방학이 마지막 기회라고 할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치르지 못 하게 했다. 혹여나 모의고사로 좌절하여 공부를 멈출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여름방학이 지나가고 2학기 첫 모의고사를 보게 되었다. 수능 전 마지막 방학을 보낸 후 보는 시험이라 무척이나 비중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모의고사 전 날 밤에 기도했다. “하나님, 정말... 오를 것 같아요+_+ 히히 오를 것 같은 믿음이 자꾸 솟아나요. 그렇지만 하나님, 혹시라도 오르지 않더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게 해주세요. 저에게 공부하는 기쁨을 주신 것만으로 감사해요. 그러니 끝까지 최선을 다 하게 해주세요.”

  시험을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저녁까지 시험을 마치고 식사를 하고 점수 주러 올라가는 길에 가슴이 떨렸다. 두둥! 나의 점수는 440점이었다. 한 달 전보다 무려 100여점 이상이 오른 것이다. 나는 정말 복도에서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셨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교실에 들어갔을 때에 여느 모의고사 때처럼 분위기가 침울 하였다. 분명히 겸손한 마음으로 조용히 감사해야 하는데 나의 참을 수 없는 기쁨과 감사의 분출이 “성적 오름”이라고 얼굴에 나타났다. 그동안 열심히 했던 나를 지켜봐왔던 친구들이 나에게 점수를 물어보았고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했다. 후로 정말 고대가 닿을 것 같았고 끝까지 최선을 다 했다. 드디어 수능이 다가왔다. 그러나 성적은 생각과 달랐다. 난이도가 너무 낮아서 만점을 많이 배출했다는 수리의 점수가 20점이나 떨어져서 고려대는 물론이고, 냉철하게 볼 때에 4과목을 보는 대학에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수리를 제외한 등급과 수리를 합한 등급의 차이가 9등급이었으니 꿈은 사라졌다. 그동안 행하신 일을 다 잊고 나는 하나님께 실망을 하였고 내 생활은 무너져 갔다. 대학 지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자고 먹고 노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생활 때문에 부모님과의 갈등도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의 권유로 서울에 올라갔다. 오빠와 나는 서울 곳곳을 구경하고 쇼핑을 해댔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도착한 곳은 오빠가 서울에서 다니는 교회였다. 마침 금요일이라 철야예배에 갔는데 예배 도중 마음이 풀어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사랑을 점수 하나 만으로 외면하며 돌아선 나의 모습이 보였고, 이런 나를 아직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예배 시간 내내 울며 하나님께 회개했다.
   
그렇게 하여 오게 된 곳이 바로 이 곳 이대이다. 사실 수리 점수의 하락으로 이대를 꿈꿀 수도 없었으나, 논술 덕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대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논술 준비를 하지 않았었으나 논술 시험 5일 전에 서울에 올라와 학원을 다녔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듯이 정말 엉뚱했다. 시험 5일전에 학원을 가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 5일 동안 내가 정말 논술을 못 한다는 것을 알았다.ㅠ 논술로 합격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논술로 불합격하는 사람은 많다는 선생님 말씀이 곧 ‘너는 떨어질 애야’로 들렸다. 사실 그랬다. 특별한 서론을 원했기에 쓰는 예화는 글의 통일성을 헤치고, 분량은 언제나 부족하였으며, 시간에 맞춰서 써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은 더 커졌다. 그러나 논술 문제를 받고 정말 놀랐다. 고3 때 유일하게 본 영화의 내용이 논술주제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영화 스토리로 서론에서 결론까지 논술할 수 있었고 30분의 여유가 있어 퇴고의 시간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대에 오게 되었기에 대학생활을 당신에게 드리겠노라고 약속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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