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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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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홍정희 집사(안동교회)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막10:46-49)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나는 이 바디매오를 좋아한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체면 불구하고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적극성과 옆 사람들의 만류와 꾸짖음에도 아랑곳 않았던 그의 확신에 찬 행동이 부럽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를 감동시키는 부분은 그가 예수께 나아갈 때 서슴없이 그의 겉옷을 내어 버렸다는 점이다. 이 장면이 압권이다. 나를 포함하여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면서도 ‘자기’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리지 못한채 그분 주위만 맴돌고 있었는가? 바디매오는 비록 앞 못보는 거지였지만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열망과 그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겉사람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자기 결단이 있었다. 30년이 넘게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겉 사람의 껍질을 깨지 못했던 내게 이러한 바디매오의 모습은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온다.

“날라리 집사” 얼마 전까지 다녔던 직장의 동료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우연히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본 동료들이 “정말 교회 안 다니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자기가 강한 사람이 신을 믿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집사라면 왠지 얼굴의 거룩함과, 교회 냄새가 풍길 것만 같은데 전혀 나에게서는 그런 기미를 볼 수 없다는 말이었다. 크리스천에게서 어떤 정형을 기대하는 그들이 다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나에게서 예수님의 향기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결혼을 하면서 안동교회에 등록을 한 나는 교회의 아웃사이더였다.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잘 몰랐고 그저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어려웠다. 내게 있어 이 교회는 단지 남편의 교회일 뿐 10년을 한결같이 손님처럼 교회를 다녔다. 게다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이 둘을 연년생으로 낳고 보니 봉사활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주일예배 때 두 아이를 씻겨서 데리고 오는 것만도 거의 전쟁이다시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면서 내 영혼이 점점 시들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난 일에 몰두해 있었고 그것을 통해 얻는 성취감에 빠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내 의지랑 상관없이 직장을 그만 두어야하는 사정이 생겼다. 아이 둘을 낳고도 일을 그만 두려하지 않던 나도 내 건강 문제 앞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직장을 그만 둔 후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 십 년 동안 어느 학교, 어느 직장에 속해 있으면서 마치 그 껍데기가 진짜 나인 것으로 착각하며 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고작 손바닥 반 만한 명함에 내 전부를 걸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정말 잘 살아 온 것일까?”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두드리고 있었다.

1997년 가을, 영적으로 곤고해 있던 내게 주님은 손을 내미셨다.

세상과 예수님에 한 발씩 걸친 채 편리한 대로 살아온 나를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셨나 보다. 우연히 동네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찬양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 아름다웠고 말할 수 없는 평화로움에 나도 찬양을 따라 불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왈칵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옆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정말 그치고 싶은데 이미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뼈 아픈 고백이 터져 나오기 사작했다. “주님 용서해 주세요.

저는 오래 전에 주님을 제 삶에서 밀어냈습니다. 저는 기도했지만 진정 주님을 제 주인으로 모신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제 뜻이 예수님을 앞질렀지요. 입술로 찬양했지만 제 마음에 감사가 없었습니다. 저는 교만했고 저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나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결코 잘 살아온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을 기다려 오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부터 예수님은 나의 겉 사람을 벗겨 내시기로 작정하신 듯 여러 방법으로 나를 훈련시키셨다. 새벽 제단을 쌓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나의 아침잠은 고 3때도 8시간 수면을 채우고야마는 거의 고질병(?)에 가까운 것이어서 결단치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놀라우셨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나를 깨우셨고, 때로는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게 만드시기도 했다. 우리 가족이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날에는 꿈에서 “정희야 일어나! 어서 기도해라. 어서 일어나 기도해라” 하시며 깨우는 바람에 잠결에 일어나 기도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 안에 10개월을 보냈을까. 전도사님의 권유로 뒤늦게 이슬비 전도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슨 봉사를 할 수 있을까 계속 기도하고 있었던 참이라 순종했지만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내가 제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키시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해 본 적 없고, 먼저 말도 안 건네는 내가 지나가는 사람 붙들어가며 접촉 카드를 받고, 안 열어 주는 문고리를 흔들어대야하니 나를 먼저 깨뜨리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덧 이슬비 전도 활동을 시작한지 1년 반이 되어간다. 이제야 나는 주님께서 왜 이슬비 전도를 시키셨는지 그 이유를 알 것같다. 예수님은 내가 믿지 않는 이들을 전도하는 것도 원하셨겠지만 일차적으로 나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 같다. 자존심 강하고 내 일이 아니면 거의 무관심했던 내게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가를 경험케 하셨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한 진정 예수님도, 이웃도 사랑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

나는 지금 삶으로부터 자유롭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약할 때에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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