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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사선을 넘어 자유의 품에, 주님의 품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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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양신옥 성도 (탈북) (영락교회)

  북한에서 1995년 척추결핵 수술을 받았으나 결과가 좋지 않아 10년 동안 수술부위를 통해 결핵균이 흘러 나왔다. 작은 딸은 2001년 5월 새별 인민 병원에서 백혈병 진단을 받고 한 달을 입원해있었으나 가망이 없으니 살아있는 동안 잘 먹이고 기쁘게만 해주라고 했다. 또 큰 딸은 같은 해 2001년 6월에 늑골 결핵으로 청진수성만성병원에 두 달간 입원해 있으며 수술을 받고 처음에는 결과가 좋은 것 같았지만 워낙 가난하여 먹는 것이 부실하니까 회복이 안 되고 영양실조까지 겹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대로 있다가는 모두 죽을 것 같아서 2002년 1월 27일에 탈북을 결심하고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갔지만 찾던 친척이 없었다. 한 달 동안을 문밖 출입을 금하고 중국에 숨어 있으면서 마침 다른 친척 한 분을 만났고 그 분이 한국으로 떠나면서 쌀 15kg을 남겨주고 갔는데 나는 그 쌀을 한 톨도 안 남기고 북으로 들어가는 먼 친척 편을 통해 아이들을 맡아 돌보시는 이북 친정집으로 보냈다.

  그 후 나는 때 꺼리가 없어서 3일을 굶었다. 중국에 두 달을 더 머물면서 한국에 나가 계신 친척으로부터 남한으로 들어오라는 재촉을 받고 남한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통해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도착하고 보니 내가 통행한 그 길이 보통 위험한 길이 아니었다. 미리 알았다면 도저히 감행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어차피 그곳에서 죽을 목숨인데 거기서 죽으나 오다가 죽으나 모험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무사히 만날 수 있다는 보장 없이 탈북을 감행 시켰다. 다행히 아이들은 중국과 베트남, 캄보디아를 거쳐서 무사히 한국으로 들어왔다.

  오는 과정에서 백혈병이 있는 작은 아이는 코피를 많이 흘려서 베트남 병원에서 수혈을 받은 후 길을 떠났다. 안내하시는 분이 아이가 너무 작고 약해서 업어줄려고 했지만 거절하고 스스로 걸었다고 했다. 나중에 이유를 들은 즉, 일행들 틈에서 떨어지면 자기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거나 팔아먹을까봐 안 업히고 6시간을 걸었다는 것이다. 이 아이는 열 살이지만 워낙 못 먹고 아파서 아주 작다.

내가 중국의 훈춘에서 2003년 7월 9일 출발하여 한국에 도착한 날이 그 해 9월 25일이었다. 아이들이 들어온 날짜가 내가 들어온 날짜와 비교해 보니 꼭 일 년 만에 들어온 것이다. 나는 그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하루하루 아이들이 생각나서 누가 먹으라고 밥을 주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국가에서 마련해준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는 있지만 좋은 느낌이 없었고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만 생각이 났고 가슴에 뻥 뚫린 구멍사이로 찬바람만 술술 들어왔다. 내 모습은 껍질만 남은 허수아비 같았다. 나는 너무 외로워서 스스로 순복음 교회에서 운영하는 자유 시민대학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북한 사람들이 모여서 믿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북한의 주민들의 실상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말을 할 수 있는 짐승이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삶이 아니다. 오직 조선중앙 TV를 통해 눈 멀고 귀 멀게 해놓았다. 하다못해 소금도 없고 된장도 없어서 미나리만 소금 간 없이 삶아 먹다가 퉁퉁 부어서 영양실조로 가족들이 모두 죽기도 한다. 북한의 실정이 그러한데도 오직 당의 선전뿐이고 당 간부들과 또는 당과 연결된 사람들만 배불리 먹고 잘산다.

  이웃에 이철수라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착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는 일본에서 왔는데 늘 ‘풍년 새’ 라는 노래만 부르기에 별명이 ‘풍년 새’였다. 그런데 당에서 농장을 분배받았는데 운영을 못해서 당에서 세출을 걷어 가면 늘 먹을 것이 모자라서 남에게 빌려서 먹는 형편이었으나 그것조차도 사는 게 모두 어려우니 빌리기도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이철수네 가족들은 늘 배를 곯았다. 나중에 이철수가 이웃 마을의 처녀에게 장가를 갔는데 하루는 집안에 개가 있기에 잡아서 가마에 삶아서 먹으려고 할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 아이였다는 것이다. 너무 배가 고팠었는데 아이가 순간적으로 개로 보였다는 것이다. 이철수는 태어나서 살아오는 동안 배불리 먹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예수 믿는 것이 발각되면 당국에 잡혀가서 고문을 받다가 죽거나 유배되어 결국 죽게 된다. 2000년도에 고향에서 6명이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당국에 잡혀가는 일이 있었다. 처음에 전도를 하신 분은 할머니셨는데 그분은 늘 인자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섬기시는 분이었다. 외국과 중국등지에서 사시던 분으로 오래전 모택동 혁명시기에 시류가 어려울 때 할머니의 아버지가 북한 사람이라서 북으로 넘어오게 된 아버지를 따라와서 사시다가 다시 중국과 외국으로 나가 사셨다고 한다. 그 할머니의 자녀들은 모두 중국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고 모두 목회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잡혀갈 때 가택 수사과정에서 성경책을 압수해갔다. 할머니가 전도한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그 의사와 함께 일하던 여자가 당국에 신고를 한 것이다. 또 다른 국군포로의 자녀도 부부간에 잡혀갔다. 잡혀간 분들은 고문을 받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필경은 한 사람도 살아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한국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깨닫고 보니 나와 아이들이 살아서 한국까지 들어온 모든 여정이 오직 나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나는 신학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늘 아이가 아프기에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학교에서 MT를 갔는데 아이가 수혈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학우 한 분이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사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돈’이라고 대답했고 그분은 그럼 ‘십일조’를 꼭 드리라고 말씀해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아멘’을 하였다. 사실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남한에서는 교회에 가면 십일조 내라 감사헌금 내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러는 것에 거부감이 심하다.

  이유는 북에서 착취를 받아온 피해 의식 때문에 교회라는 곳은 돈만 빼앗고 착취하는 곳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목숨을 살려주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감사도 모른다. 그리고 북한에서 한국의 기독교를 북한 주민들에게 교육 시켜온 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즉 남한의 종교는 왼편 뺨을 때리면 오른편 뺨을 내밀라고 하고, 미제(미국)가 들어와서 남한 사람들을 쇠뇌 시키고 머저리를 만든다고 선전한다. 즉,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미를 외치고 있다.

  한편 나는 십일조헌금에 관해 아멘으로 응답하고 그 날 이후로 십일조 생활을 시작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이 병원에 한 주에 세 번 갔었는데 두 주에 한번으로 줄게 해주셨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아가며 믿음이 커지게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다. 그리고 생각지 않던 수입이 생기고 나에게 해를 끼치고 돈을 갈취했던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참고 인내 했더니 지금에 와서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 되었다.

  강남금식기도원에 온 것은 하나님께 두들겨 맞을 각오로 왔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큰 복을 주셨고 감사 할 일이 수없이 많건만 자꾸 의심이 생겨서 그것을 하나님께  내놓고 회개하며 혼나려고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혼내시지 않으시고 전보다 더 큰 은혜로 채워주셨다. 병이라는 고난을 통해서 결국은 한국으로 인도하신 생명의 하나님의 큰 은혜를 조금밖에 못 깨닫고, 믿고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의심도 있었고 때로는 콩이야 팥이야 따졌던 것을 회개하였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깨달아진 것은 내 아이가 아플 때 내 마음이 아픈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고 마음 아파하실 것을 생각하니 그저 감사의 눈물만 흐른다.

  난 이전에는 그저 내 가족 내 자녀만 위해서 기도 했었다. 신학을 하게 된 동기도 부디 아이들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과 내 마음과 정서가 워낙에 메 말라있어서 그것을 충전하고 찾기 위해서 시작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도제목이 달라졌다. 북한의 주민들, 유리하는 그 영혼들이 불쌍하여 견딜 수 없다. 장차 하나님께서 인도하심 가운데 어려운 북한 사람들을 살리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돕고 싶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정리 : 강남금식기도원 간증 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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