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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화상으로 짧아졌던 다리 길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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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김지영 성도(순복음교회 영등포대교구)

화마의 상처 치료하신 하나님
   
모두 다 곤히 잠든 일요일 새벽. 눈을 뜨니 엄마가 나를 다급하게 깨우고 있었다. 엄마 뒤로 불과 탁한 연기가 보였다. 우리집 아래층에서 불이 났는데 불이 옮겨붙어 3층인 우리집까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아빠는 엄마와 오빠, 나를 먼저 창밖으로 내보낸 후에 마지막으로 뛰어내리셨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따로 따로 병동으로 옮겨졌고 아빠와 나는 연기를 많이 마셔서 의식불명의 상태로 며칠을 보냈다. 사고가 난 것은 2005년 10월 9일, 그로부터 6일 뒤 전신 69%의 화상을 입고 갈비뼈 7개가 부러진 아빠는 천국으로 떠나셨다. 남은 식구들은 그 사실을  모른채 각자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엄마는 떨어지면서 이마와 코, 턱뼈가 부러졌고, 오빠는 목과 척추, 비뇨기를 다쳤다. 나는 얼굴과 가슴, 왼쪽팔 일부를 제외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 병원 도착 당시에는 의식이 있었지만 속이 울렁거리면서 한차례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난 다음 정신을 잃었다. 의식불명 상태에서도 지독한 꿈을 꾸는데 몇번은 자꾸 아빠를 따라나가려는 꿈도 꿨다.

열흘 뒤 깨어났을 때는 끔찍한 화상의 고통으로 진저리치는 나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신 62%의 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7개월 동안 피부이식 수술을 14차례 받았다. 처음엔 7∼8번 이번 된다고 했는데 자꾸 실패했다. 고통과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엄마! 너무 아파서 죽고 싶어. 하나님께 가고 싶어”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엄마는 평소에도 약한 말, 부정적인 말을 싫어하셔서 약해지려는 나를 강하게 붙들어주셨다.

14차례의 수술로 처음보다는 많이 호전되었지만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다리에 감각이 없고 마비증상도 생겨 휠체어에 앉아 생활을 했다. 작년 7월 조용기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고 난 다음부터는 절뚝이는 걸음이나마 내발로 걷게 됐다. 피부가 당겨져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확연히 짧아졌다. 병원에서는 근육과 피부를 늘리는 수술을 권유했지만 결과가 좋으리라는 장담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식에 쓸 피부와 인대를 적출하려면 그나마 멀쩡한 왼쪽팔을 못쓰게 될까봐 걱정도 됐다.

나는 용인대에서 태권도를 전공하고 있었다. 어릴적부터 뛰어다니고 이곳저곳 누비면서 20여 년을 살아왔는데 사고 때문에 마음껏 걸어다닐수 조차 없게 된 것이다. 따갑고 가렵고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3월에 마지막 이식 수술을 앞두고 엄마의 조언으로 성경학교에 등록했다. 모태신앙이지만 나는 주일에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 크리스천이었다. 성경학교에 다니면서 성경지식 외에도 성도 간의 교제 속에 그전엔 몰랐던 기쁨도 알게 됐고 불편한 몸이지만 봉사도 하면서 보람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10일 주일 예배를 드리며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11시 예배를 드리던 중 조용기 목사님이 신유기도 시간에 ‘한 쪽 다리가 짧은 사람이 나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즉각 내게 하신 말씀임을 확신하고 “아멘!”이라고 크게 외쳤다. 예배를 마치고 걸어 나가면서 내가 좌우 균형이 맞게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함께 예배드린 친구에게 ‘잠깐 나 걷는 것 좀 봐죠’라고 말하고 걸어보였다. 어느새 오른쪽 다리가 길어져서 왼쪽과 비슷한 길이로 맞춰졌다. 더이상 다리를 절룩이며 다니지 않게 됐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는 왜 착하고 성실한 아빠를 이렇게 허무하게 데려가셨는지, 왜 우리에게 이런 사고가 났는지, 왜 사고가 하필 내가 학교 태권도 시범단에 발탁 되어 미국 진출을 눈앞에 누고 있을 시점에 났는지 생각하면 그저 속상하고 억울했다. 지금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적과 성도들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아픔을 이겨내고 살아가고 있다. 오빠도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수술 한번 없이 깨끗하게 치유돼 그전처럼 교회학교 아동 1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주변에 그를 아는 친구들은 빠른 회복에 우스갯소리로 괴물 같은 치유력이라며 놀라고 있다.

우리 세식구의 치료비로 2억 5000만원이 청구됐다. 보증을 서지 않으면 수술을 못한다고 해서 부모님의 형제들이 보증인이 됐다. 다들 평범하게 살고 있는 형편인데 순식간에 친척들까지도 병원비로 알거지가 될 상황이었다. 우리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도움의 손길이 모아졌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중보기도를 해주었고 영등포 2교구 식구들은 이후로도 수도 없이 우리가족을 위해 기도로 모였다. 같은 지역에서 신앙생활하던 교인분들이 영세민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모두 자기 식구의 일처럼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경기대와 용인대에서 학생들 사이에서의 모금운동이 펼쳐졌고, 순복음가족신문에 게재된 계좌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사람들로부터 성금이 들어왔다. 어떤 20대 아가씨는 첫월급을 통째로 가지고 왔다. 막대한 병원비가 수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해결이 됐다. 화재 후 온전히 회복되지 못한 몸으로 오갈 곳이 없을 때도 영등포대교구의 모금활동으로 살 집이 마련됐다. 생필품, 가재도구 하나 없었는데 엄마와 친한 집사님, 권사님들이 꼭 필요한 것들을 필요한 때에 하나씩 들고 오셔서 살림도 마련됐다.

사고 전 나는 출세와 성공, 명예욕에 사로잡혀 남들보다 잘 놀고, 공부 또한 열심히 했다. 그때는 그 것만이 전부인줄 알았다. 그리고 사고를 당했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다.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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