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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아, 나도 죽을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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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 :  이순례 권사(안동교회)

며칠 전 중환자실에 한 달 이상 누워 있다는 친구를 찾았다. 면회 시간은 하루에 두 번. 오전 11:30-12:00, 오후 7:00-7:30분까지였다. 오전 11시30분에 병원에서 준 가운을 입고 중환자실에 들어섰다. 장기입원 환자들이 20여 명도 넘게 누워 있는 방에서 옛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친구를 찾았다. 잠을 자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저렇게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모든 장기가 망가지고, 말도 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에 잠시 동안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나 면회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친구의 손을 잡고 이름을 불러 보았다. 친구가 눈을 떴다. 나를 알아보겠으면 눈을 깜박여보라고 했다. 여러 번 그렇게 말했으나 친구는 손끝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굴을 찡그리는 듯 싶더니 눈가로 눈물이 그득 고였다. 그 눈으로 한참 동안 뚫어지게 바라만 볼 뿐 미동도 하지 않더니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나는 이미 차디찬 친구의 손을 잡고 소리를 내어 간절히 기도했다. 결국 이것이 이별일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울면서 병실을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죽음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이 살아간다. 그리고 비교적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산다 하더라도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다가왔을 때는 그 차이가 크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지난 겨울, 갑작스럽게 수술을 했기 때문에 <믿음과 생활>란의 글을 써 보라고 했을 때 처음에는 사양했다. 그러나 편집위원회에서 "죽음"에 대해서 한 번 써 보라고 다시 권유했을 때 이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기로 하였다.

2003년 1월 21일 오후, 오른쪽 유방에서 콩알만한 것이 딱딱하게 잡혔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22일, 처리해야 할 일들, 만나야 할 사람들을 불안 속에서 정리하고 만났다. 23일, 아침 일찍 서울 백병원으로 가서 초음파 검사를 했다. 24일, 결과는 좋지 않았다. 오후에 조직검사를 하고, 29일, 그 결과가 나온다고 했다. 2cm를 넘기지는 않았으나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다.

29일, 결과는 생각보다 나빴다. 담당의사는 구정 지나고 곧바로 입원하여 수술해야 된다고 했다. 절제수술을 해야 하며 전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었다. 다만 초음파 검사 결과가 나온 날,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의사 앞에서 울면서 박 장로님께 전화로 도움을 청했었다. 장로님은 위로해 주시면서 세계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그 방면의 명의를 소개해 줄 터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그 순간에 박 장로님이 안 계셨더라면 어떻게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을까. 식구들에게는 단 하루라도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직검사 결과가 다행히 양성이면 웃으면서 식구들에게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피해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외출한 남편을 기다렸다.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간 채 소파에 길게 누워서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상상했다.

절제된 한쪽 유방, 항암치료 기간의 과정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을 고통의 시간들…. 아, 차라리 죽는 것은 간단할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죽음에 밀착되어 그 쪽으로 생각이 뻗혔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가진 것들…. 생각보다도 쉽고 단순하게 모든 것은 해결되었는데, 단 한 사람 남편이 걸리었다. 아, 그이를 어떻게 하나. 그가 당할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하나….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침착해야 된다고 서두를 꺼내고 사실을 말했다. 그는 잠시동안 침묵하다가 나를 위로했다. 다른 장기보다는 유방 쪽이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남편이 아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구정이 2월 1일이어서 일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택배들이 오가고, 사람들이 오가고, 그런 가운데서 나는 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두렵고 떨릴 뿐이었다. 밤이면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면서 날을 밝히었다. 온 몸이 바짝바짝 조이면서 타 들어가는 듯했다. 미국에 있는 친정식구들이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 결과를 보고 내가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구정엔 우리집이 큰집이어서 모두 우리집으로 모였다. 웃음소리가 끊긴 구정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였다. 모두 할 말을 잃고 무거운 뒷모습으로 돌아갔다.

2월 2일은 주일이어서, 2월 3일 아침 일찍 서울 백병원에 입원했다. 그 전, 주일 오후에 뒷목에 갑자기 커다란 몽우리가 딱딱하게 생겼다. 놀라운 일이었다. 의학에 대한 상식이 없으므로 나는 이미 목으로 전이된 줄 알았다.

그때의 절망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기도를 했다. 결과가 어찌되든지 주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2월 3일, 소식을 들은 몇몇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울고 웃고 기도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의연하게 이 고비를 넘기겠다고 내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2월 5일 아침, 목 뒤의 딱딱한 몽우리는 괜찮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놀라고 긴장할 경우 임파선이 그리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오후 1시 넘어서 수술실로 실려갔다. 그리고 5시30분 넘어서 방으로 돌아왔는데, 이상한 것은 그 과정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다. 수술실에서 커다랗고 둥근 등을 본 것 외에는.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목이 쉬어 말이 나오지 않았고, 구토가 심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는 절제수술을 했는지의 여부가 매우 궁금했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저녁에 담당의사가 왔다. 그는 아주 놀라운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절제를 하지 않고 수술을 무사히 마쳤으며 임파선 12개를 떼어내어 조직검사를 하는 중이나 당신의 소견으로는 괜찮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 하나님! 하나님! 감사, 감사합니다. 그때까지도 방안에 가득 모여 있던 식구들의 얼굴에도 비로소 안도의 빛이 감돌았다.

일주일 후, 임파선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전이가 하나도 되지 않아서 항암치료도,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근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로 알렸다. 흥분해서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입원한 지 보름만에 무사히 퇴원했다. 퇴원 후 22일 동안 매일 통원치료를 받았다.

내가 죽음 속에 있던 기간은 초음파 결과를 안 날부터 수술을 할 때까지이다. 그때 절실하게 느낀 것은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아주 갑자기 단순해졌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생각 뿐, 지금까지도 인도해 주신 주님께서 앞길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자기 자신이 존재에서 비존재로 갈 수도 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 소득도 없는 곤혹스러운 일상, 그러면서도 번거롭고 또 권태스러운 일상, 그 일상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이라는 생각이 절실했다. 짜증과 불평불만은 삶에 대한 감사를 잊고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앞으로는 매순간의 일상을 더욱 충만하게 영육간에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웃에게 눈길주기, 생활은 단순하게 생각은 높게, 그리고 언젠가는 이 일상을 끝내고 그(주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아름다운 희망으로, 그 희망만큼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는 기쁨으로 걸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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